1983년 기적이 일어났다. 한 번도 공부를 잘해 본 적이 없던 내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대학원 미생물학과에서 합격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순간 지난 7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 자신이 대견했고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다.
나와 아내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구했다. 식탁조차 없어 종이상자 위에 밥을 차려 먹었지만 아내와 나는 이 가난한 삶도 그동안의 노력으로 맺은 결실이었으므로 기뻐했다.
그런데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앉은 순간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단 교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생물공학 전공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최초의 학생이었으므로 물어볼 선배도 교수도 없었다. 더구나 내가 진학한 미국의 미생물학과는 순수 자연과학에 속했다. 주로 발효와 식품공학 중심으로 공부하던 한국의 환경과 전혀 달랐다.
미국 대학원은 학생들에게 평균 B학점 이상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매일 4시간 정도만 자며 공부했는데도 B학점을 받지 못했다. 학교는 내게 한 학기의 기회를 더 주겠다며, 그런데도 누적 평점이 B가 안 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각오로 두 번째 학기를 맞았다. 나는 강의를 녹음해 집에서 다시 들으며 내용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는 미국 학생에게 도움을 청해 강의 후 필기 노트를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친절하던 미국 학생이 돌변해 영어도 못 하면서 미국에 뭐 하러 왔냐며 ‘고 홈’(Go home)’이라고 소리쳤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비참하던지.
결국 다음 학기에도 성적 평점이 B가 못 돼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쫓겨나기 전 수많은 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지만 어디서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았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집에 그냥 있자니 비참해서 아침이면 집을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토플과 대학원 자격시험 공부를 했다.
하나님은 애초에 학습 능력이 없는 나를 왜 공부하게 해서 감히 유학까지 넘보게 하셨을까. 그렇게 인도하셨으면 순조롭게 하실 일이지 이렇게 비참하게 쫓겨나게 하실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당시엔 에드나 어머니의 편지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1985년 나는 예쁜 딸도 얻었다. 자식까지 생겼는데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가장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도널드 딘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냐고 물어보는 편지였다. 교수를 직접 만나 어느 학교에서도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자기가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미국 대학은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영어와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검증된 나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은 늘 상식을 뛰어넘으셨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