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 지형이 변하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기존 수출 시장이 주춤한 사이 동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로 수출 전선이 넓어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우리나라의 국가별 수출실적과 호조국가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9월 수출 증가액이 컸던 상위 10개국 중 미국(7위)을 제외한 9개국이 동유럽·중동·중앙아시아 국가였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비교적 주변 시장으로 여겨졌던 국가에 대한 수출이 급증하고 있다”며 “기존 주요 교역국의 수출까지 반등한다면 최근 회복세에 더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 증가액 ‘톱3’ 국가는 폴란드, 헝가리, 튀르키예로 집계됐다. 유럽 배터리 시장을 겨냥해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이 생산 공장을 각각 운영 중인 폴란드와 헝가리에선 지난 1~9월 배터리 원료인 정밀화학 제품 수출이 각각 30.1%, 73.8%(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다. 같은 기간 현대차 완성차 공장이 있는 튀르키예에도 자동차부품 수출이 40.1% 증가했다. 이들 3개국이 국내 기업의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한 셈이다.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중동 국가도 새로운 수출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의 인프라 프로젝트 열풍에 정부의 세일즈 외교가 더해지면서 방산·원전·건설기계 수출이 급증했다. 사우디는 다연장로켓 천무, 유도로켓 비궁 등 국내 무기류 수출이 1년 새 88.1% 늘었다. 네옴시티 프로젝트와 친환경 발전 사업 확대로 건설중장비와 유압식 변압기 수출도 각각 81.7%, 133.3% 증가했다. UAE는 한국전력의 바카라 원전 수주로 핵연료 우라늄 수출이 494.2% 늘었다. 카타르도 국내 기업의 가스전 공사 수주 등으로 한국산 무계목강관(420%), 화학기계(5482%) 수출이 급증했다.
지정학적 위기도 한국 수출에 반사이익으로 작용했다.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장기화로 자동차 무역이 어려워지자 올 1~9월 한국산 중소형(1500~2500㏄) 자동차 수입을 전년 대비 573.5% 늘렸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국내 중소형 자동차(32.4%)·자동차부품(615.6%) 수출이 증가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1~9월 중국 대만 일본 등 주요국 수출 증가율은 각각 마이너스(-) 24.3%와 -29.4%, -9.0%를 기록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수출 증가액 상위 10개국 중 미국을 제외한 9개국 수출 총액은 약 337억 달러로, 수출 4위국인 일본(215억 달러)보다 1.5배 크다”며 “익숙한 시장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발전 가능성이 높은 틈새 시장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