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위해 꿈 미뤘던 청년 “내가 좋아하는 일 할 거예요”

입력 2023-11-09 04:06 수정 2023-11-09 15:42
지난 6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한국관광공사와 아동권리보장원, 아코르앰배서더코리아가 진행하는 취업 지원 직무교육에 참여한 자립준비청년 A씨(25)가 실습 첫날 테이블 세팅을 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지난 6일 서울의 한 유명 호텔 레스토랑. 유니폼을 입은 A씨(25)가 떨리는 손으로 와인잔과 물 잔을 테이블에 세팅했다. A씨가 와인잔의 볼 부분을 잡고 내려놓자 호텔 서비스팀 관계자는 “와인잔을 세팅할 때는 지문이 남지 않게 이 부분(다리)을 잡아야 해요”라고 안내했다. A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와인잔을 잡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날은 자립준비청년인 A씨가 호텔로 첫 출근한 날이었다. 170시간 사전 교육을 이수했지만, 실제 손님이 찾는 호텔에서는 잔 하나, 포크 하나 내려놓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바로 손님을 응대하진 않았지만, A씨는 앞으로 일할 공간의 명칭과 해야 할 일들을 숙지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A씨는 “화려하고 멋진 곳인 줄로만 알았는데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많은 노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A씨는 보육원에서 나온 뒤 홀로 독립했다. 생활비를 벌며 바쁘게 지내다 문득 꿈을 찾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히말라야 여행을 떠났고, 다양한 숙소에 묵는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호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살아온 A씨에겐 호텔리어를 꿈꾸는 것 자체도 용기가 필요했다. 특성화고등학교나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배우지 않은 데다, 외국어 능력을 요구하는 직업 특성상 벽이 높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아동권리보장원 카카오톡 채널 공고를 통해 ‘호텔리어 직무교육과정’ 모집 글을 보게 됐다. 이 과정에 지원한 A씨를 비롯한 7명의 자립준비청년이 최종 선발됐다. A씨는 “간절한 꿈이었고,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배워서 멋진 호텔리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립준비청년들은 시설 독립 이후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한다. 자립정착금이 주어지고, 자신이 저축하는 금액에 후원금을 매칭하는 아동발달지원계좌 ‘디딤씨앗통장’에도 가입할 수 있다. 시설 보호 종료 후에도 넘어지지 않고 혼자 설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해 진정한 자립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취업이 중요하다. 하지만 자립준비청년은 당장 생활비 걱정에 생계형 일자리를 구하기 급급한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진로를 찾고, 직업 교육을 받아 취업까지 연계해주는 지원이 절실하다. 민관에서 다양한 취업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지만, 요즘 청년 세대가 원하는 직업과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구직·구인 간 ‘미스 매치’도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한국관광공사와 아동권리보장원이 진행하는 ‘취업 애로 청년 관광기업 연계 직무교육’ 프로그램은 청년들이 선호하는 호텔업계 프로그램으로 진행돼 인기가 높았다. 특히 글로벌 호텔체인인 아코르앰배서더코리아와 함께 교육을 진행하는만큼, 유명 호텔에서 일하길 원하지만 주저했던 자립준비청년의 관심이 높았다.

신재구 한국관광공사 관광인재개발실장은 “자립준비청년들은 보호기간 종료 후 곧바로 취업시장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 다양한 경험과 진로탐색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며 “이를 고려해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직무경험을 제공하고 일자리 연계 등 안정적인 사회 진출을 지원하고자 기획했다”고 말했다.

교육 프로그램은 비전공자인 자립준비청년들 눈높이에 맞춰서 진행됐다. 비즈니스 매너의 기본이나 대인관계 리더십 교육, 호텔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어 기본 표현을 집중적으로 익히는 방식이다. 이달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2개월간 실제 호텔에서 실습을 마치면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관광일자리센터와 연계해 구인을 희망하는 호텔과 ‘매칭데이’도 실시한다. 취업 연계로도 이어질 수 있는 과정인 것이다.

아코르앰배서더코리아 관계자는 “프로그램을 통해 호텔 기본 업무뿐 아니라 대인관계, 직업윤리, 책임감 등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해 사회 일원으로서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직업 기회와 경제적 자립성을 제공해 자립준비청년들이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보텔 앰배서더 동대문 호텔 식음파트에서 실습 중인 강동영(23)씨 역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로에 대한 고민도 하고, 적성을 찾을 수 있었다. 강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설에서 나왔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를 택한 탓에 곧바로 자퇴를 했고, 당장 돈이 필요해 일을 해야 했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이 없는 강씨가 갈 수 있는 곳은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뿐이었다. 강씨는 “정말 힘들게 일을 했는데, 계속하다 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자립준비청년들이 진로와 경제적인 것 중에 고민을 많이 하는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적성도 찾고 꿈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은 “앞으로 자립준비청년의 수요에 맞는 양질의 일자리 제공이 가능한 기업을 적극 발굴하고, 직무 교육과 직업 체험 등을 함께 제공해 지속 가능한 취업 지원 모델을 우리 사회에 확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