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명환 (1) 믿음으로 극복한 전쟁의 상처와 고달픈 실향민 생활

입력 2023-11-07 03:01
조명환 월드비전 회장이 6일 서울 영등포구 월드비전 사무실에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이 고향인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자 혼자 피란을 내려왔다. 땅을 많이 소유한 재산가였던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이북에 머물기로 하고 혹시 모르는 참상을 피하려 장남인 아버지만 남한으로 내려온 것이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생하다 다시 38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다가 국군에 체포됐다.

이때 아버지는 고등학생이라 머리를 삭발한 탓에 북한 인민군으로 오해를 받아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설명해 포로의 신분에서 풀려났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 가족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전쟁 후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으셨다.

북청군 북창읍이 고향인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피란을 오셨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흥남에서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나오는데 어머니와 가족들은 바로 그 배의 맨 아래층에 타고 흥남을 탈출해 사흘 뒤 성탄절에 거제항에 도착했다.

나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 후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이였고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실향민이어서 생활은 매우 고달팠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에 나를 비롯한 세 학생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직 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니 당장 집에 가서 등록금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직도 훤한 대낮에 울면서 학교 문을 나서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착실히 교회에 나가고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늘 반에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돌아보면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는데 꿋꿋이 책상에 앉아 공부했던 것이 참 신기하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내가 성실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공부 잘하는 축복을 받고 싶었지만 결국 고3 때 꼴찌까지 하는 굴욕을 맛보며 졸업했다. 하지만 세상 공부와 달리 하나님 교육은 잘 받아 소화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았다. 어머니는 서울 금호동 천막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다 나를 낳았는데 나는 지금도 내가 태어난 그 교회를 다니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은 나의 신앙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한번은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것이 아깝다며 교회 앞에 서서 어머니가 교회 가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수를 영접한 뒤 아버지는 세상 풍습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기도와 말씀의 양식이 풍성하게 넘쳤다.

약력=1956년생, 건국대 미생물공학과 졸업, 미국 애리조나대 대학원 이학박사,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행정학 석사, MIT경영대학원 블록체인 최고경영자 과정, 건국대 생명과학특성학과 교수, 넥솔바이오텍 공동창업,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 건국대 명예교수, 한국월드비전 제9대 회장.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