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회피도, 단죄프레임도 그만… “공감과 회복으로”

입력 2023-10-30 00:03 수정 2023-10-30 00:36
2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 유가족과 시민들이 참석해 있다. 권현구 기자

159명의 생명을 앗아간 10·29 이태원 참사가 29일로 1년이 됐다. 유족과 생존자에게 1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이 기간 정부·여당은 책임을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야당은 끝없이 단죄를 외쳤다. 진정한 애도와 회복 대신 정쟁이 계속됐다. 사랑하는 사람을 서울 한복판에서 잃은 유족의 슬픔과 상실감은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다. 재난안전법 등 관련 대책은 말만 무성한 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회에 계류돼 있다. 1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이태원 참사 이전보다 안전한 사회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 원로와 학계 전문가들은 여권의 책임 회피와 야권의 책임자 처벌에 집중한 정쟁이 참사 당사자의 회복을 가로막고,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체 차원의 대책 마련 실패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젊은 아이들이 안타깝게 희생됐는데, 한 번 화내고 몇 명 처벌하고 끝내는 건 목숨과 생명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이태원의 희생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논의를 이어가는 게 피해자들의 명예를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 교수는 “우리 사회와 국민 인식을 ‘누가 잘못했냐’에서 ‘결국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이 젊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라는 인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권은 참사 이후 누구를 처벌할 것이냐를 두고 양극단으로 나뉘어 극한 대결로 치달았다. 그 사이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과 위로, 실질적 제도 개선은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다산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 우석대 석좌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정신을 거론하며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정부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태도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놀러 가서 죽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라며 “하다못해 출동한 소방관들도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정부는 어떻게서든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법적 책임 여부만 따지느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할 공직자로서의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어 “어렵게 법을 세워 절차를 만들어도 결국 집행하는 건 정부다.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순간 어떤 재난대응도 제대로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참사 초기 일주일간 국가애도기간을 정하고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이후 유가족 호소에 충분히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장인 자캐오(민김종훈) 신부는 “정부가 유족을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민원인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다”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마치 선심 베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추모 집회마저 정치적 집회라고 낙인찍으면서 참사 피해자는 민원인에 불과하다는 시선을 더욱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참사의 정쟁화가 희생자와 생존자를 향한 2차 가해 분위기를 키웠다는 분석도 있다. 이태원 참사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군은 참사 현장에서 친구 2명을 잃은 채 극심한 죄책감과 2차 가해에 시달리다가 지난 1월 21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직전 녹사평역 분향소 바로 옆에선 극우 유튜버들이 확성기를 틀어놓고 참사에 악담을 퍼부었다. 비난의 화살은 참사 피해자들을 향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가족의 상처를 기억하면서 생명존중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성헌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생명의 가치는 절대가치인데,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감수성이 상당히 낮은 사회가 됐다”며 “이태원 참사를 돌아보면서 ‘우리 사회가 생명에 대해 어떤 가치를 두고 있나’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라우마 분야 전문가인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정부는 희생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피해자 유가족과 생존자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 이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둔 것을 이 사회의 부끄러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교수도 “참사는 반복된다. 수사와 처벌만으로는 국민 전체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며 “우리 사회가 함께 희생자에게 미안해하며 우리 사회가 안전해졌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용현 김재환 백재연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