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담긴 문구가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는지에 대해 대법원이 “그렇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학문적 주장이나 의견의 표명일 뿐 허위 사실을 쓴 것으로 볼 수는 없어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론이 나오기까지 대법원 심리에만 6년이 걸렸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박 교수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6일 밝혔다.
대법원은 검찰이 문제 삼은 35개 표현 전부 의견에 해당한다고 보고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명예훼손죄에서 의견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학문적 표현에 관한 명예훼손 사건 판결을 할 때는 사실과 의견을 분류하는 작업부터 신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2013년 8월 ‘제국의 위안부’ 초판을 냈다. 책 속에는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는 동지적 관계’ 등 문구가 포함돼 논란이 일었다.
이듬해 6월 당시 나눔의집 소장이던 안신권씨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9명 이름으로 박 교수를 고소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그해 11월 명예훼손 혐의로 박 교수를 불구속 기소했다.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이 박 교수 기소에 대해 항의 성명을 내는 등 논란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다. 1, 2심 판단도 무죄와 유죄로 극명히 엇갈렸다. 1심은 35개 중 5개 표현이 ‘사실의 적시’에 해당하지만 피해자가 특정되거나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35개 중 11개 표현이 ‘사실의 적시’이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허위 내용이라고 보고 유죄로 판결을 뒤집었다. 책 내용이 독자들에게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돼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했고, 일본군에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은 위안부를 강제연행하지 않았다’고 읽히도록 서술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박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오랜 기간 연구해 강제동원 및 일본군 관여 사실을 알면서도 허위 사실을 단정적으로 표현했다”며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학문적 표현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표현에 숨겨진 배경이나 배후를 섣불리 단정해 ‘사실을 적시한 부분’으로 인정했다”며 2심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도서의 전체 내용이나 맥락에 비춰보면 박 교수가 검사 주장처럼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을 부인하거나,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 행위를 했다거나,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제의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의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제국주의 사조나 전통적 가부장제 질서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측면도 분명히 있으므로 전자의 문제에만 주목해 양국의 갈등을 키우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제의식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읽힌다”고 했다.
대법원은 또 “국가가 다양한 학문적 견해 중 어느 하나만 옳다고 선언하는 것은 학문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부당 침해”라며 “표현의 적절성은 형사 법정에서 가려지기보다 자유로운 공개토론이나 학계 내부에서 검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나눔의집은 박 교수를 상대로 할머니들에게 3000만원씩 배상하라는 민사소송도 냈었다. 1심은 지난 2016년 위안부 할머니 9명에게 총 9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 변론은 2017년이 마지막이었는데, 다음 달 22일 6년 만에 변론 기일이 열린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