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개선” 떠들더니 정쟁만… ‘재난안전법 개정’ 손도 못대

입력 2023-10-27 04:06
이정민 10·29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조성 기자회견’에 참석해 사고 현장에 설치된 조형물을 바라보고 있다. 권현구 기자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정부가 다중인파사고 재발 방지 및 예방을 위해 추진해온 각종 대책은 여전히 현장에 도입되지 못했다. 대책의 기본이 되는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재난안전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국회가 법 개정을 처리하지 못한 탓에 행정안전부, 경찰·소방 등 다중인파 관리 책임 기관이 마련하려던 매뉴얼도 줄줄이 보류된 상태다.

참사 직후부터 수차례 “마련하겠다”고 해왔던 인파관리시스템에 대해서도 행안부는 “이달 중 마련하겠다”고 했다. 재난응급의료 비상매뉴얼 개정이나 경찰·소방 공동대응 체계 마련 등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해 했던 다른 약속들 역시 이태원 참사 1주기를 한 달여 앞둔 지난달에야 부랴부랴 마련됐다. 이태원 참사가 남긴 뼈아픈 교훈에도 한국 사회의 대응이 더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쟁에 1년째 계류 중인 재난안전법

경찰은 지난 4월 내부적으로 다중인파 관리 매뉴얼을 마련했다. 경찰서와 지방자치단체 간 실시간 정보공유 체계 구축, 인파 밀집 시 통행 제한·이동 명령·행사 중지 등 지휘관의 적극 조치, 인파 관리에 방송 조명차 적극 활용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 일선 관서에 해당 매뉴얼을 배포하지 못하고 있다. 행안부의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26일 “상급기관인 행안부 매뉴얼 역시 법 개정이 선행돼야 하는 작업이어서 행안부와 경찰 모두 매뉴얼 배포 및 시행을 공식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최대 쟁점은 주최 측이 불분명한 행사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였다. 핼러윈 축제의 주최는 명확히 없었고, 이를 이유로 당시 용산구청과 행안부, 경찰, 소방은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직후 “주최가 없는 자발적 행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인파 사고 예방 시스템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안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등 책임기관의 장들은 앞다퉈 법·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사고 직후인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 관련 법안 20여개가 발의됐다. 주최 측이 없는 행사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지자체의 안전관리 책임을 명시하는 내용의 법안 등이다. 하지만 지난달 20일에야 소관위원회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다. 국정조사, 이상민 행안부 장관 탄핵 등 국회가 이태원 참사를 두고 정쟁을 거듭하면서 정작 법안 심사는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경찰·소방 공동 규정은 9월 말 마련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속도도 느리다. 국회 행안위 소속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행안부로부터 제출받은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 세부과제 추진상황 및 향후 일정’ 자료를 보면 대책 이행률은 지난 21일 기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초 올해 행안부는 41건의 과제를 완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추진 완료’된 계획은 13건에 불과했다. 반복신고 감지시스템 도입, 재난관리자원 통합시스템 구축, 재난 안전 연구개발(R&D) 조정 및 협업 기능 강화 등이다.

참사 1주기를 앞두고서야 관련 규정이 마련된 경우도 적잖다. 행안부는 ‘긴급기관(행안부·경찰·소방·해경) 간 공동대응 시 현장확인 의무화 규정’을 지난달 26일에야 개정했다. 참사 당시 경찰과 소방의 유기적 협조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구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소방이 경찰에 10차례 넘게 인파 통제를 요청했지만, 대응이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경찰과 소방이 공동대응할 경우 상대기관의 출동차량, 출동대원의 연락처와 같은 정보를 문자로 전송하는 서비스는 지난 24일부터 실시됐다. 행안부는 “지난 4월부터 문자제공 서비스 개발 작업에 들어갔고, 8월부터 한 달간 권역별 시범 운영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재난응급의료 비상대응매뉴얼도 아직

참사 당시 응급환자 이송에 차질을 빚으면서 재난응급의료 체계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119구급대와 의료기관의 정보공유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보건복지부는 소방청과 함께 ‘재난응급의료 비상대응 매뉴얼’ 개정안을 올 상반기까지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개정안 역시 지난달에야 마련돼 아직 배포조차 되지 못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연구용역 의뢰 등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하느라 예상보다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해당 매뉴얼은 다음 달 배포될 예정이다.

이해식 의원은 “참사 9일 만에 ‘범정부 재난안전관리체계 개편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3개월 만에 ‘국가안전시스템 종합대책’을 내놨다”며 “1년이 지났지만, 정작 이행률은 저조하다. 반성 없이 내놓은 정부의 주먹구구식 종합대책에 대한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국회가 더는 재난안전법 개정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난 경주·포항 지진 이후 행동 매뉴얼을 신속히 만들어 시민들에 대한 교육이 이뤄졌었다”며 “법적 절차에 가로막혀서 책임기관들이 원칙에 따라 매뉴얼 공개가 어렵다면 차선책을 강구했어야 한다. 공신력 있는 민관기간을 통해서라도 인파 다중운집 사고 시 행동 요령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