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슨모빌·쉐브론 등 석유 메이저 기업들이 동종업계 기업을 상대로 대규모 인수·합병(M&A)을 하며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세계 각국의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도 석유·가스 수요가 오히려 견고하게 유지되자 독과점 체제 구축에 나선 것이다. 최근 독일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이 내연기관 차량 퇴출에 ‘속도조절’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기름을 부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형 석유 기업들이 화석연료보다 재생에너지와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더 빨리 줄어든다는 전망에 베팅하고 있다”고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의 ‘석유 공룡’ 쉐브론은 이날 원유 탐사·시추 기업 헤스를 530억 달러(약 71조2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헤스는 신흥 산유국으로 떠오른 남미 가이아나의 해저 유전 사업권을 갖고 있다. 이번 인수로 쉐브론은 110억 배럴 이상의 매장량을 보유한 가이아나 해저 광구의 지분 30%를 확보하게 됐다. 가이아나는 2015년 해저 유전이 발견된 후 탐사·개발 과정에서 예상 매장량 규모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10년 새 가장 큰 석유 발견지인 가이아나에 메이저 기업이 발을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엑슨모빌도 이달 초 미국 3대 셰일오일 기업인 파이어니어내추럴리소시스(파이어니어)를 약 595억 달러(약 80조원)에 사들였다. 역대 석유업계 M&A 중 최대 규모로, 엑슨모빌은 2009년 천연가스 기업 XTO에너지 인수(410억 달러) 이후 14년 만에 ‘빅딜’을 성사시켰다. 엑슨모빌은 파이어니어 인수로 미국 석유·가스 산업 중심지인 텍사스주 퍼미안 분지의 생산량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로이터통신은 “엑슨모빌이 퍼미안 분지에서만 하루 13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형 석유 기업들은 그간 ‘석유의 종말’에 앞서 친환경 에너지 투자를 확대해 왔다. 엑슨모빌은 오는 2027년까지 수소 및 이산화탄소 포집 등 저탄소 사업에 170억 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BP와 토탈에너지스 등 유럽 석유 메이저 기업들도 재생에너지 투자에 잇달아 뛰어들었다.
하지만 화석연료 수요가 좀처럼 꺾이지 않으면서 석유 기업들의 기조도 회귀 양상을 띠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분위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고유가가 지속되며 석유 기업들의 ‘곳간’도 두둑해졌다. 쉐브론은 지난해 365억 달러(약 45조원) 순이익을 기록하며 1879년 회사 설립 이후 최대 실적을 이뤘다. 최근 유럽연합(EU)에 이어 영국까지 ‘완전한 전기차 전환’ 시점을 2030년에서 2035년으로 연기하고 나선 것도 ‘석유 재조명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석유 업계에서 메이저 기업들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