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 다녀왔다. 일하고 여행하는 3주간의 체류 기간 동안 도시는 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스쳐 지나갔다. 내가 느끼기에 뉴욕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이곳에 사는 친구는 뉴욕은 ‘fun hell(재미있는 지옥)’이고 샌프란시스코는 ‘boring paradise(지루한 낙원)’라고 불린다고 전해주었다. 자극적인 것들은 쉽게 내 안에 기록됐다. 밤거리에서 만난 쥐와 바퀴벌레, 쓰레기가 쌓여 있는 철로, 낡고 더러운 골목의 화려한 그라피티, 이와 대조되는 높고 세련된 건물들과 화려한 매장, 세계 최고의 고급 식당들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의 더러움과 소란스러움이 견디기 힘들었다. 세균에 대한 강박이 있는 나로서는 지하철을 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이 더러움과 혼란스러움이 어떤 방식의 용인과 포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의 결벽 역시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내기 바빴던 현대화의 과정 속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이 ‘깨끗하지 못함’의 범주에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포함돼 있기도 했다. 사회가 생각하는 정상 아닌 것들은 대체로 불결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뉴욕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이 도시의 속성이라는 것이 하나로 수렴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다양함 자체가 뉴욕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낮의 서울에는 검은 머리를 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젊은 동양인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다양한 인종, 직업, 나이, 장애 유무, 젠더를 가진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양한 사람을 볼 수 있기에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도 쉬웠다. 나와 다른 타자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범주가 넓어진다는 사실을 너무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