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왜 안 웃어요? 오늘 기분 나쁜 일 있나 봐?” 골프장 캐디로 23년간 일해온 송모(45)씨는 최근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라운딩 시작 전 막 인사를 나눈 상황에서 한 중년의 남성 고객이 대뜸 송씨에게 웃지 않는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린 홀까지의 거리 측정이 부정확하다며 막말을 내뱉는 고객도 종종 있다. “거리측정기는 103m라고 나오는데 왜 100m라고 말하냐. 이럴 거면 캐디를 바꾸겠다”는 식이다. 송씨는 ‘제가 기계도 아니고 그렇게 정확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죄송합니다”라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캐디 업무 특성상 고객 불만 제기로 중간에 교체되면 수당을 받을 수 없어서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이 시행된 지 18일로 5년이 되지만 현장에선 송씨처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많다.
해당 법은 회사가 업무와 관련해 고객을 비롯한 제3자의 폭언 등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필요한 경우 사업주는 업무를 일시 중단하거나, 휴식시간 연장 등의 조치를 해야 한다. 노동자가 고소·고발 등을 진행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도 지원해야 한다. 감정노동자 보호의 책임을 사업자에게 지우는 법이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갑질119와 아름다운재단이 지난달 4~11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회사가 업무와 관련해 제3자 폭언 등으로부터 노동자를 잘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8.8%가 ‘잘 보호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특히 캐디의 경우 직업 특성상 증거 확보가 쉽지 않아 사측에 보호 조치를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음성이 자동 녹음되는 콜센터 등과는 달리 CCTV도 거의 없는 넓은 골프장에서 통상 고객 4명을 홀로 상대하며 일하기 때문이다. 송씨의 경우 회사 측에 보디캠 제공과 골프 카트 내 블랙박스 설치를 요청했지만,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법안이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김광훈 노무법인 신영 공인노무사는 “현행 법안은 ‘사업자가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명시돼 있다”며 “사업자들이 알아서 하라고 할 게 아니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필요한 조치들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법 조항의 효과가 나타난 사례도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 시행 이후로 콜센터 등에 전화할 때 ‘상담원에게 폭언 등을 하지 말아 달라’는 멘트가 나오게 됐다”며 “감정노동자들에게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법에 근거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적으로 큰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감정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근로자의 정신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과제”라고 덧붙였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