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변명이 아닌 증명의 삶으로

입력 2023-10-13 04:01

불통의 세상을 만드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합당치 않음과 함께 엄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말은 모두 그럴듯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고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네가 그렇지 않으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은 핑계다. 구실을 찾았을 뿐이고 자기변명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넘어 공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은 진정 겸손하게 ‘나는 똑똑하지도 못하고 힘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여러분이 주시는 힘과 내어주는 마음을 따라서 부족하지만 책임을 감당해 보겠노라고 해야 한다. 왜냐면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일이기에 그렇다. 어느 공동체든 혼자 독불장군일 수 없다. 대화와 타협으로 다른 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던 주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사람들은 환호성과 함께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 있었지만, 그 속을 모르지 않은 주님의 심정은 한편 무겁기도 하고 또 뿌듯하셨을 거라 짐작된다. 짧은 공생애가 인정보다는 부정과 불신이 더 많았고 함께 가는 길보다는 외롭고 고독한 걸음의 연속이지만 언제나 당당하셨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주님은 당신의 삶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변명하지 않으시고 증명하셨다. 당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회피하거나 유보하지 않으셨다. 때로는 말씀으로 들려주셨고, 때로는 행동으로 나타내셨고, 때로는 침묵이나 눈빛으로 하늘 뜻을 이루시고 증명하셨다. 하나님의 뜻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사람들과 세상 앞에서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당시엔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비참한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실은 그 자리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분의 말씀은 힘을 얻어 다시 생생하게 증거됐고, 예수와 같은 삶이 곳곳에서 되살아났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의 변명이나 회피가 없는 삶이다. 존재와 삶이 자연스럽게 증거가 되고 증명이 되는 수순이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팔레스타인에 검은 구름이 드리웠다. 이미 편이 갈라져 비난과 두둔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솔직히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양쪽 주장이 내용과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지상 감옥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 다르다.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국 세상은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편으로 기울어지지만, 솔직히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이 맞는다. 고통을 당하고 절망의 자리에 있는 생명이 눈에 밟힌다.

정답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해법은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그것을 위해 씨름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제 것을 양보하고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한 일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오신 게다. 사람과 세상으로서는 도무지 답이 없으니 하나님이 극단의 처방을 내리신 것이다. 문제는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는 어떤가. 숱한 아픔과 눈물로 얼룩졌지만 우리는 한민족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가 있고 긴 역사가 있다. 일제의 아픔과 고난의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남과 북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이 비록 크지만 넘지 못할 산이 아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든, 새로운 세대든 그런 아픔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된다. 어떤 정치든, 미래든, 신앙이든 이제는 구차한 변명이나 구실은 필요 없다. 지금의 자리와 상황에서 존재의 역할을 증명하고 대안을 찾고 만들어내야 한다.

백영기 쌍샘자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