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나님의 일터] “아트북과 전시로 치유·평화 주는 ‘영혼의 닻’”

입력 2023-10-14 03:04 수정 2025-05-19 15:20
지난해 8월 종영한 케이블채널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고래가 주요 소재였다. 고래는 주인공 우영우가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였다. 이 콘셉트에 영향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진 전문 출판사 대표다. 주상연(53) 닻프레스 대표는 이 드라마의 배경인 법무법인 태평양 회의실에 커다란 고래 그림을 배치하는 ‘아트 컨설팅’을 맡았었다. 최근 서울 구의동 사무실에서 만난 주 대표는 소명에 따라 사진 전문 출판사를 차리고 지난 13년간 운영해왔다.

사진계 제자 양육 소명 따라

주 대표는 서울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사진디자인 석사를 마친 뒤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대학 강단에 섰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다 200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 배경 속에서 자라나며 훈련받아온 소명의식이 꿈틀댔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사진의 매력을 전파했지만 정작 사진작가로 자생하기 어려운 국내 현실에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에서 석사학위를 땄다. 하지만 공부보다 더 값진 건 멘토를 만난 것인데 사진작가 린다 코너였다. 그는 코너가 설립한 사진 관련 협회에서 예술가와 학생, 북 컬렉터가 함께 일하는 걸 지켜봤다. 그러면서 사진과 작품 의도가 고스란히 담긴 아트북 역할에 매료됐다. 주 대표는 귀국해 2010년 사진 전문 출판사인 닻프레스를 세웠다.

‘영혼의 닻’ 내리고 해외에서 인정받아

주 대표가 20여년간 모은 국내외 사진 서적들이 사무실 한쪽에 전시돼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닻프레스는 아트북 출판이 주력 사업이다. 아트북에는 사진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다른 형태를 띤다. 특히 주 대표는 국내외 숨은 고수를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하는 데 공을 들인다. 닻프레스가 내세운 ‘다품종 소량 생산’은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기에 사업 시작 후 몇 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회사명은 성경 히브리서 ‘영혼의 닻’(6:19)에서 시작됐다. ‘깊은 곳에 거하려면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말을 되뇌며 버텼다.

닻프레스는 한국 출판사로 유일하게 최대 아트북페어인 뉴욕아트북페어에 7년 전부터 참하고 있다. 주 대표는 “파리나 뉴욕 등 세계적 아트북페어에서의 판매가 닻프레스 연간 수입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뉴욕공립도서관 국제사진센터 스탠퍼드대 등 미국 유명 도서관과 기관에는 닻프레스 아트북이 소장돼 있다. 주 대표는 “해외 북컬렉터에게 ‘한국엔 사진 시장이 없는데 어떻게 사진 전문 출판사가 있느냐’는 질문을 듣기도 한다”며 “우리 아트북 70% 이상이 해외 작가”라고 전했다. 닻프레스는 우리나라 1세대 사진예술가로 꼽히는 주명덕 작가와 전시회나 아트북을 제작하는 등 국내 작가와의 작업에도 힘쓰고 있다.

무명작가의 작은 목소리 전한다

닻프레스는 고래 사진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진작가 브라이언 오스틴을 2018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오스틴은 한국의 독립출판사인 닻프레스의 출판 제안에 ‘소울풀(Soulful·혼이 담기다)’하다고 동의했다고 한다.

닻프레스 사무실에 있는 공방 모습으로 책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출력기와 제본기 등을 갖추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이처럼 닻프레스는 작가 개인의 자기 고백 같은 이야기를 고유한 색깔로 전하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닻프레스 사무실에 있는 제작 공방에는 질감이 다른 종이가 수십 가지, 직접 출력하고 제본할 수 있는 기계가 마련돼 있다. 10권 미만 소량 제작도 하며 이렇게 만든 아트북을 닻미술관 전시회나 해외 아트북페어에서 판매하기 한다. 주 대표는 “작은 농장의 유기농 채소 같은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닻프레스를 이끌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관객 혹은 독자의 반응을 들었을 때에요. 누군가 아트북이나 전시로 치유와 평화를 경험했다거나 우리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걸 인터넷 후기나 방명록을 통해 알게 될 때 ‘애쓴 보람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선한 영향력 끼치고파

주 대표는 닻프레스의 몇 가지 운영 방침을 강조했다. 본인을 포함한 직원이 의미 있는 일을 찾는 일터가 되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설립과 함께한 실장을 포함해 직원 대부분 오랫동안 주 대표와 합을 맞췄다. 또 하나는 예술가의 창작 창구가 되는 것이다. 주 대표는 “작가가 무명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며 “귀한 작업을 하는 이들이 계산적이지 않은 생태계 안에서 더 솔직한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했으면 한다”고 했다. 관객이나 독자가 닻프레스 전시나 아트북을 통해 취향을 존중받는 것이 다른 한 가지 목표다.

주 대표가 함께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닻미술관은 운영 초기 교회 옆 미술관이기에 오해가 있었다. 주 대표는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술관이긴 하지만 우리가 다루는 콘텐츠는 그 안에 머물지 않는다”며 “종교 프레임 안에 예술은 힘이 약하고 프레임 안에서 갇혀있다면 그 너머로 나갈 수 없다. 종교가 아닌 다른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주를 질문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