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77년 가을학기였습니다. 첫 학기에 조직신학 세미나와 실천신학 세미나를 수강했습니다. 교회사 과목으로는 이장식 교수님의 교회와 국가 세미나를 택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교회와 군사정권 간에 갈등이나 충돌이 자주 발생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만이 가끔 회보나 강연회를 통해 교회와 정부 관계를 다뤘습니다. 이것 말고는 정교(政敎) 관계를 성서나 기독교의 전통을 통해 설명해주는 책이나 선생님을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도나티스트 논쟁시 제기된 교회와 국가 문제를 석사 논문의 주제로 잡았습니다.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 추종자들 간에 일어난 신학논쟁이었지만 이 논쟁에 로마제국이 개입했습니다. 논문을 쓰고 있던 1979년 10월, 서울 강북구 송암교회에서 사와 마사히코(澤正彦) 목사님이 강연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사와 목사님은 도쿄대 법대 졸업 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공부한 일본인으로 송암교회 협동목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정부와 교회 간의 충돌을 보면서 1977년부터 2년 동안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가서 종교자유 정교분리 같은 주제를 공부했습니다. 그는 1979년 8월 서울로 돌아와 선교사로서 체류 허가를 신청 중이었는데, 어느 교회의 설교에서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국가권력에 물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발언이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출국명령을 받았습니다.
추방당해 서울을 떠나기 전날 사와 목사님은 송암교회에서 ‘신앙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습니다. 그 고별 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정교분리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한국에는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부터 일제 강점기, 이북에서의 투쟁,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나 체험만 있지, 그 체험에서 나온 로고스, 말, 이론 등이 없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자유에 관한 연구가 시작돼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미국의 한 시골이라 할 텍사스주 웨이코라는 곳에는 신앙의 자유, 교회와 국가만을 공부하는 대학도 있다고 했습니다. 몇 년 후 저는 그가 소개한 베일러대학교 대학원 교회-국가학과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후일 사와 목사님은, 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든 한국을 떠나면서 진행한 그 강연이 “한국 청년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 유언 같은 내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강연은 ‘신앙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월간지 ‘현존’(1979년 12월호·표지)에 게재돼 제가 거듭해서 읽은 ‘내 인생의 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