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는 외환위기 이후 장기간 지속적으로 누적돼온 우리 경제의 위험 요인이다. 증가 속도가 빠르고, 대출구조도 취약하다. 정부는 지난해(2011년)부터 가계부채 대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2012년 7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가계부채 동향 및 서민금융지원 강화방안’을 발표하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10여년 전 발표 내용이지만 최근 상황 설명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오히려 가계부채 문제는 그때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지적이다. 올해 2분기 말 가계대출 잔액은 1748조9000억원으로 1분기보다 10조1000억원 증가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2분기 말 기준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1.7%로 세계 4위 수준이다.
국내 연구기관과 국제기구는 가계부채를 한국 경제의 최대 ‘뇌관’으로 평가한다. 가계부채는 장단기적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늘어난 가계 빚 부담은 소비 둔화, 내수 침체, 투자 부진으로 이어져 경제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고 경기 침체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국만 증가한 가계부채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의 위협 요인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때는 2000년대부터였다. 10일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005년부터 금융부채 증가율이 가처분소득 증가율을 웃돌기 시작했다. 다른 국가에서 부채가 감축되는 국면에서도 한국의 가계부채는 꾸준히 ‘우상향’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 가계부채는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을 경험했지만, 한국만은 예외였다. 이 때문에 한국은 국제적으로 경제 주체의 소득이나 기초 경제여건에 비해 과도하게 가계부채가 누적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한국의 가계부채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가계부채 문제가 금리 상황과 부동산 경기와 복합적으로 연동돼 있어 예리하게 가계부채 문제만을 도려내 수술하는 정책을 펴 본 적이 없다는 게 근본 원인이다.
일부 정권에서는 가계대출 확대를 정책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명박정부 때는 전세난이 심해지자 전세자금 대출 제도를 도입했다. 대출 규모는 제도 도입 이후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했다. 당시 전세 대출 확대 정책이 가계부채 증가의 ‘씨앗’이 됐다. 박근혜정부는 저금리 상황에서 부채로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아예 “빚내서 집 사라”라고 권하는 방식의 정책 추진이 이뤄졌다. 가계부채가 1300조원을 넘어선 상태에서 출범한 문재인정부는 코로나19 확산기에 풀린 돈이 부동산 시장에 몰리면서 ‘가계부채가 가장 많이 증가한 정부’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정책당국이 무엇이 가계대출 증가를 부추길지 알면서도 쉽사리 제어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당장 눈앞에 닥친 리스크 해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이 정권에서만 터지지 않으면 돼’라는 생각으로 숙제 해결을 미루는 식이었다. 윤석열정부도 현재까지는 이전 정부와 다를 게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전 정부에서 급등한 부동산 경착륙 방지에 힘을 쏟다가 정책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가계대출 증가세가 지속되자 정책 당국자들은 가계부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카드는 마땅치 않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가계부채를 연착륙시키는 게 제가 한은 총재가 된 이유”라고 말했지만 한은으로서도 해법을 찾기는 어렵다. 1% 이내의 기준금리 미세조정 외에는 금리 인상 카드조차 쉽게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계부채 둘러싼 미묘한 시각차
“최근 가계부채 책임이 금융위원회, 한은, 기획재정부 중 누구한테 있나. 누가 책임을 지고 관리해야 하나.” 2년 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나온 질의 내용이다. 이에 이주열 당시 한은 총재는 “다 같이 책임을 지고 관리를 하는데 수단이 다르다”고 답했다.
사실 가계부채를 바라보는 시각은 금융당국, 한은, 기재부 간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계부채 문제를 다루는 ‘정책 툴’도 서로 다르다. 이는 범정부 차원의 획기적 대책이 나오기 어려운 한계로 지목된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가계부채와 관련한 컨트롤 타워가 사실상 없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일단 금융위가 가계부채 주무부처다. 다만 금융위는 한은, 기재부에 비해 미시적 접근을 하는 경향이 있다. 금융당국은 최근 가계대출 증가세 주범으로 인터넷전문은행의 비대면 주택담보대출(주담대)과 50년 만기 주담대를 지목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금융기관 압박 방식의 단편적 대책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기재부는 부동산 시장과 내수 등 전반적인 경기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한 결과와 함께 종합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다룬다. 가계대출을 지나치게 조이는 정책을 추진할 경우 경제주체 소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무작정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는 정책을 펴기는 어렵다. 유동성을 관리하고 ‘금리 조정’이라는 정책 수단을 가진 한은은 기재부에 비해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가계부채가 경제에 미칠 장단기 영향을 분석한다.
정책당국이 말로만 ‘문제’라고 하면서 대책 마련에는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한 금융위 관계자는 “국내 가계부채의 상당 부분은 금융자산을 많이 가진 이들이 지고 있고, 이들이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데도 안 갚고 있는 게 문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과 민간부채 비율 합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며, 솔직히 가계부채 발(發) 경제 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낮게 본다”고 말했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