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30분 스마트폰 알람에 일찍 잠을 깬다. 평소 잘 먹지 않는 아침식사를 7시부터 한다. 7시30분 무거운 몸을 셔틀버스에 싣고 도착한 곳은 경기 수원시에 있는 교육장. 이곳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공’한다. 수업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와 6시부터 저녁식사를 한다. 축구 동호회 활동은 잠시 쉬고 있지만 헬스와 배드민턴으로 심신을 단련한다. 올해로 스물한 살인 자립준비청년 권진철씨의 요즘 일과다.
보호시설에서 나와 지난해 2월부터 희망디딤돌 경남센터(창원)에 살고 있는 권씨는 지금 ‘수도권살이’ 중이다. 지난 8월 말부터 삼성전자 용인 인재개발원의 기숙사에 머물고 있다. 삼성이 희망디딤돌2.0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한 ‘IT서비스 기사’ 과정 직무교육생으로 뽑히면서 두 달 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됐다.
최근 인재개발원 인근 카페에서 만난 권씨는 “짜인 프로그램에 일상을 맞추는 건 처음이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교육받는 일상이 생각보다 힘들지만 재미있다”면서 웃음을 보였다. 삼성이 지난 8월 29일 희망디딤돌2.0 닻을 올리면서 자립준비청년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개설한 ‘취업교육’의 혜택을 누리는 첫 사례다. 권씨가 참여한 IT서비스 기사 직무교육 외에도 반도체 정밀배관, 전기·전자 과정도 교육생 10~20명을 받았다. 이달 말부터는 제과·제빵 기능사, 설비보전 기능사, 금형 기능사 등의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이론·실무교육도 줄줄이 시작한다. 오는 23일부터 삼성중공업 정규 생산직 채용 시 우대하는 조선·중공업 직무교육 과정도 예정돼 있다. 경남 거제시 소재 기술연수원에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다.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를 졸업한 권씨는 기계 전공을 살려 공장에 취업했지만, 일이 맞지 않아 관두고 다른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때마침 SNS에 ‘자립준비청년 취업지원사업’ 참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교육비는 전액 무료이고 숙식을 제공하는 것에 더해 별도 지원금을 준다는 점에 끌렸다. 여기에다 삼성 관계사나 협력사로 채용 연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듣고선 주저없이 지원했다. 권씨는 “자기소개서에 ‘살면서 힘들었던 경험’을 적으라는데 힘든 기억이 없어서 한참을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5㎞, 10㎞를 뛰었던 걸 적었다”고 했다. 권씨는 IT 중에서도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 새 직장에 안착하는 걸 목표로 한다.
인터뷰 자리에는 권씨의 ‘디딤돌가족 멘토’인 이종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프로도 함께했다. 지난 7월 출범한 디딤돌가족은 멘토링을 통해 자립준비청년과 결연하고 정서적 자립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삼성과 시민단체, 국민일보의 합작품이다.
이 프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자립준비청년 멘토링에 기꺼이 참여했다. 권씨 얘기를 듣고 있던 이 프로는 “지난해 만난 청년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포기’라고 하더라. 오히려 내가 (자립준비청년에 대해)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다들 성숙해 있구나 생각했다”고 전했다.
권씨와 이 프로가 멘토와 멘티로 인연을 맺을 당시는 권씨가 직무교육을 받으러 인재개발원에 입소할 줄 몰랐던 때다. 마침 권씨의 임시 거주공간과 이 프로의 직장이 맞아떨어지면서 두 사람은 매주 화요일 만나는 사이가 됐다. 8월쯤부터 멘토링을 시작했는데 이미 7, 8번을 만났다고 한다. 이 프로는 “한 명의 멘티와 최소 10회 멘토링을 해야 하는데 올해는 횟수를 초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프로는 지난해에 코로나19 팬데믹과 멘티의 여건상 ‘줌’을 통해 온라인에서만 만나야 했던 아쉬움을 날리고 있다. 전문 코치 자격증을 가진 이 프로는 삼성에서 활동하는 30인 멘토단의 전체 리더이기도 하다. 사내 코칭 프로그램은 물론 삼성 사회공헌단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남을 돕는 일’에 열성이 남다른 직원으로 알려졌다.
이 프로가 기억하는 권씨의 첫인상은 ‘매력적인 눈웃음’이다. 그런데 낯가림하는 편이라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약간 애를 먹었다고 한다. 권씨가 리오넬 메시의 ‘광팬’인 축구 마니아라는 걸 알고 축구를 매개로 다가갔다. 이 프로는 “한 번은 일과 후에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는데 ‘맛있다’면서 배식 아주머니에게 ‘한 공기 더 먹어도 되느냐’며 공손하게 묻더라. 또 한 번은 인재개발원 내 헬스장을 이용하기에 앞서 ‘깨끗한 새 신발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참 예의 바르게 잘 자란 청년이구나’를 느꼈다. 숨겨진 강점이 아닐까 한다”고 언급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권씨에게도 남모를 고민거리는 있다. 그는 “희망디딤돌 경남센터에서 내년 2월쯤 퇴거해야 하는데 새 거주지를 마련하는 게 걱정”이라면서 “체험관에서 살아보고 입주를 결심했던 경남센터는 혼자 생활하면서 몸과 마음의 ‘자유’를 느끼게 한 소중한 보금자리”라고 말했다. 경남센터에서 지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도 처음 맞은 ‘나만의 공간’에 친구들을 초대해 집들이한 것이라고 했다. 삼성의 기부금으로 경남 창원시 의창구에 신축 오피스텔을 매입해 만든 희망디딤돌 경남센터는 생활관 20실, 체험관 3실로 구성돼 있다. 2021년 6월 개관한 이래 자립준비청년 50명이 실제 거주했고, 체험관을 거쳐 간 인원은 190명에 달한다.
용인=김혜원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