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주의 목소리 필요, 이 역할을 한경협이 해야”

입력 2023-10-05 20:56
김병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겸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이 지난 3일 서울시 중구 사랑의열매회관 집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올해 임기 6개월의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을 지낸 김 회장은 4대 그룹의 복귀를 이끌어 낸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들려줬다. 권현구 기자

김병준 회장은 올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이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대행이라는 굵직한 두 기관을 맡으면서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공식 직함이 2개로, 시쳇말로 ‘본캐 부자’다. 지금은 전경련에서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김 회장은 고문으로 물러났지만 회장으로 재직한 6개월의 짧은 기간에 ‘4대 그룹 복귀’를 끌어냈다. 지난 3일 서울시 중구 사랑의열매회관에서 만난 김 회장은 4대 그룹 총수와 회동한 뒷얘기를 비롯해 복합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지적했다.

김 회장은 먼저 “어떤 날은 4대 그룹 총수와 만났다가 바로 노숙자를 만나러 가는 극단적인 하루가 있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면서 “정도와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희로애락에는 재벌도 취약계층도 예외가 없더라. 인생을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언뜻 보기엔 두 기관 사이에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사랑의열매는 한경협(옛 전경련)에서 수백억원을 출연한 덕분에 탄생했다. 현재도 한경협 회원사의 기부금 비중이 크다.

4대 그룹의 한경협 복귀 얘기를 꺼내자 눈빛이 달라지기도 했다. 김 회장은 “처음 전경련 회장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4대 그룹의 재가입은 고민 대상도 아니었고 부수적인 걸로 판단했다. 역사의 흐름을 놓치고 있는 전경련 조직의 본질적인 혁신에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직무를 시작해 보니 ‘김병준이 일을 제대로 했느냐’의 기준점이 4대 그룹 복귀라는 걸 체감했다고 한다.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그게 바로미터가 돼 있었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마지막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전했다. 2시간20분에 걸친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풀었다.

-연말이 가까워진다. 사랑의열매는 경기에 민감한데 어떤가.

“물가 상승률과 경제 성장률은 중요한 경기 예측지표다. 정부에서는 수출이 살아난다고 하는데 살아나든 아니든 상관없이 대단히 경기가 어렵다. 언론 보도보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경기는 더 나쁘다.”

-학계와 정·재계를 두루 거친 경험칙에서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한다면.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모두가 위기에 대한 감각이 흐려졌다. 지금 우리는 ‘아차’하는 순간에 큰 위기를 맞을 심각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경제 펀더멘털이라기보다 외환관리 미흡으로 닥친 유동성 위기였다. 금융위기도 외생적이었다. 반면, 지금의 위기는 세계 경기 침체와 맞물린 우리나라의 구조적 위기다. 지난 10~20년을 우리는 부채에 의존해 살아왔다. 가계와 기업, 국가부채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산업 구조조정도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위기가 현실화한다면, 기존과 충격이 다를 것이다. 단기간에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국가 전체를 조망하는 하나의 팀이나 기구가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기업 경영에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나, 같은 맥락에서 기업 내부에도 (삼성 미래전략실 같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조직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4대 그룹 복귀라는 성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총수와 직접 만났나.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워낙 바쁜 분들이라 4대 그룹 총수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부터 힘들었다. 대통령 해외 순방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한 게 일단 도움이 됐다. 서울에서도 승지원(삼성 영빈관)과 모 총수의 자택 등에서 몇 차례 회동했다. 세간의 눈을 피해 만나야 했고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의견도 신경이 많이 쓰인 게 사실이다.”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가.

“‘소위 우파라고 하는 보수 집단에도 반공주의 우파가 많다. 우리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자유시장경제 바탕에 기업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의 자유권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움직여야 한다. 이런 목소리를 내는 효과적 기구가 한경협이 돼야 한다. 기업이 언제까지 국가권력 눈치를 보면서 경영할 것이냐’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진정한 자유주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개인과 기업이 왜 자유로워야 하는지, 자유권에 수반하는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지, 국가가 하지 못하는 돌봄과 나눔을 같이 실현하는 진정한 기업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경협이 해야 한다. 이제는 권력에 로비하는 시대가 아니라 국민과 소비자에 로비하는 시대다.”

-윤석열정부의 3대 개혁 중 가장 시급한 것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교육개혁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과도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연금개혁은 국민 간 논쟁이 엄청나고 정치적 저항이 클 것이다. 현실적으로 국민 공감대를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노동개혁이다. 노동개혁하면 ‘자르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새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산업 구조조정과 같이 가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길을 개척하도록 교육·훈련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실업급여 등의 사회 안전망도 받쳐줘야 고용과 해고가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 수 있다. 즉, 노동개혁의 근본은 ‘노동시장 유연성과 안정성’이다.”

-정치권이 내년 총선만 바라보고 있어 경영계는 눈치 보기 바쁘다.

“사실상 지금은 ‘정책의 실종’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 혼자 바쁘다. 관료사회도 정치권도 안 받쳐준다. 그들은 정책 이슈를 감당할 시간도 없고 감조차도 없다. 전부 관심이 총선에 가 있어 국정감사에서 누구를 끌어내릴지, 정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지에만 몰두한다. 안타깝다.”

김혜원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