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단식투쟁의 역사

입력 2023-10-04 04:02

단식은 종교적 목적에서 시작됐다. 단식은 욕심을 억제하고 심신을 정화하며 신앙 공동체 의식 함양에 기여한다. 때문에 지금도 여러 종교에서 일정 기간의 단식을 신자의 의무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단식은 생소한 개념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 적게 먹는 소식, 곡물을 피하는 벽곡처럼 음식의 종류나 양을 제한하는 관습은 있어도 모든 음식 섭취를 완전히 중단하는 단식의 사례는 흔치 않다. 어째서일까. 조선 후기 박물학자 이규경이 말했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또 곡식을 낳았으니, 곡식은 먹어야 하는 것이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유 없이 곡식을 거절하고 먹지 않는다면 이는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단식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을 무기로 이용한 사례가 더러 보인다.

한나라 석분과 네 아들은 모두 고위 관직에 올라 녹봉이 2000섬을 넘었다. 다섯 사람의 녹봉을 합치면 1만 섬, 그래서 석분에게 붙은 별명이 ‘만석군’이다. 석분의 자식 교육법은 독특했다. 잘못을 저질러도 꾸짖지 않았다. 대신 밥상을 앞에 두고도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면 자식들이 알아서 잘못을 들춰내고 서로 책망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 사죄하면 그제야 용서하고 밥을 먹었다. ‘사기’의 ‘만석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단식투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자식 입장에서 부모가 자기 때문에 식음을 전폐한다면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임금이 신하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 영조 임금이 이 점을 이용했다. 1737년 8월 8일 영조는 감선(減膳)을 선언했다. 감선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조처다. 원래는 기상이변이나 흉년을 만나면 임금이 반성하는 취지에서 시행하는 일종의 정책이다. 하지만 이날의 감선은 달랐다. 신하들의 당파 싸움이 심각해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명목은 감선이지만 실제로는 단식이었다.

국왕이 단식을 선언하는 초유의 사태에 신하들은 당황했다. 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영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식 4일째가 되자 신하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영의정을 비롯한 주요 신료들이 관모를 벗고 대궐 뜰에 엎드렸다. 두 번 다시 당파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자정이 지나서야 영조는 비로소 감선을 철회한다는 명을 내렸다. 신하들은 영조가 눈앞에서 죽을 뜨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불충과 불효가 무엇보다 큰 죄가 되는 나라에서 부모와 임금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윗사람이 단식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영조는 이후로도 당파 간의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단식을 거론하며 으름장을 놓곤 했다. 제멋대로였던 그가 저지른 수많은 기행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당파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단식이 약자의 무기가 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의 수단으로 단식을 이용했다. 간디의 투쟁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20년대부터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노동자와 수감자의 단식이 이어졌다. 단식은 약자의 투쟁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간디는 단식을 통해 인도 내부의 계급 간, 종교 간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다. 간디의 단식이 거룩한 이유는 그가 농민과 노동자, 불가촉천민,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와 통합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가 없는 단식은 증오와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