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은 노동을 완성하고
인생을 포만하게 만들며
문명을 꽃피우게 한다
인생을 포만하게 만들며
문명을 꽃피우게 한다
한가위 연휴가 끝났다. 지인 한 사람은 이번 주에도 휴가를 써서 평소 가고팠던 먼 나라로 긴 여행을 떠났다. 힘겨운 노동과 달콤한 휴식은 우리 인생을 이루는 두 축이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일을 하고, 놀이와 휴식으로 지친 몸을 북돋는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자아를 형성하고, 삶을 이룩하며, 나아가서 문명의 기둥을 세운다.
노동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최초로 보여준 이는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이다. 서사시 ‘일과 날’에서 헤시오도스는 형제 페르세스와의 유산 분쟁에서 패소한 후 신들을 향해서 직접 정의를 호소한다. 페르세스가 재판관들을 매수해 억울하게 재판에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법의 정의가 멈춘 곳에서 시의 정의가 시작된다. “페르세스여, 그대는 정의에 귀 기울이고, 오만을 늘리지 말라!”
오만을 고대 그리스어로 휘브리스(hybris)라고 한다. 한 인간이 신의 뜻이나 자연 질서에 도전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을 가리킨다. 오만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착각은 파멸, 즉 신의 징벌로 이어진다. 신은 인간이 자기 말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잠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자만은 멸망에 앞서고, 오만은 몰락을 부른다.”(16장 18절)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평소 우리는 “아욱과 둥굴레에 얼마나 큰 이익이 감춰져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땀 흘려 일해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재산을 일구는 일을 얕잡아보고 폭력과 투쟁, 협잡과 음모로 다른 사람 몫을 빼앗고 약탈해 부를 쌓는 자를 우러른다. 인간 사회에 사악한 다툼과 부정한 꼼수가 만연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는 오만으로 이룩한 부이고, 결국 파멸의 씨앗이 될 뿐이다.
아욱과 둥굴레에 감춰진 이익은 신이 “대지의 뿌리”에 인간 몰래 숨겨둔 보물이다. 우리는 나날의 노동을 통해 정성스레 가꾸고 돌볼 때만 이 보물을 캐낼 수 있다.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고, 부자가 되는 것은 노동 덕분이다.” 이것이 신들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부, 위엄과 명예가 따르는 정당한 부이다. 명예를 이룩하는 지름길은 흩뿌려진 땀의 흔적으로만 열린다. “탁월한 것 앞에는 땀이 놓여 있다.” 거칠고 험한 인생길에서 고통을 견디면서 노력하는 자만이 좋은 삶을 빚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이 자기 삶을 향유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지만, 일만으로 인간다움을 온전히 이룩하진 못한다. 휴식 없는 노동, 여가 없는 나날은 인간을 피로와 소진, 공허와 우울에 빠뜨린다. 누구나 죽을 만큼 일하도록 내몰리고, 지친 몸으로 살아가도록 떠미는 ‘존버’의 세상이 가져온 사회적 참사가 과로사와 과로 자살이고, 심리적 재난이 우울과 절망이 아니던가.
니체는 말했다. “현대의 소란스럽고 시간을 독점하는 부지런함과 어리석게도 이를 자랑삼는 태도가 ‘신앙 없는 자’를 낳는다.” 자기 영혼을 돌볼 틈조차 빼앗는다는 뜻일 테다. 탈탈 털려 텅 빈 듯한 몸과 마음으로 좋은 삶을 살 수는 없다. 노동에 삶을 잡아먹힌 사람들은 “신중하게 자기를 아는 일을 포기”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따질 여유를 잃는다. 노동으로만 채워진 삶은 인간을 생각 없는 가축, 자유 없는 노예로 만든다.
휴식은 노동을 완성하고, 인생을 포만하게 만들며, 문명을 꽃피우게 한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정신 성취는 놀이와 여가로부터 비롯했다. 헤세는 노래했다. “놀이도 순진무구함도 필요하고/ 꽃들도 흐드러지게 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작을지 몰라/ 그리고 사는 낙도 없겠지.” 넉넉히 휴식하고, 충분히 인생을 돌아보며, 자유롭게 앞날을 꾸밀 수 있을 때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춤추고 인생은 즐거워진다. 노력과 휴식의 적절한 조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 조형술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