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깊은 얼굴·온화한 입매 구미호, 신화적 상상력 자극

입력 2023-10-03 20:38 수정 2023-10-04 18:23
‘천년의 생존과 재치’(2023, 캔버스에 유채, 75×65㎝, 왼쪽), ‘미래의 우리들’(2023, 캔버스에 유채, 55×70㎝). 스페이스K 제공

얼굴은 주름이 깊게 패여 있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강인하다. 입매에서는 온화함과 덕이 흐른다. 머리에 쫑긋 솟은 동물의 귀는 여우의 귀를, 넘치듯 흘러내리는 긴 백발은 늙은 여우의 꼬리를 연상시키는 이 여성 초상화는 강렬하다.

이런 할머니의 표정을 다른 전시장에서 본적이 없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늙고 무기력한 잔소리꾼으로 여성 노인을 이미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통념을 뒤엎듯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성 노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주인공은 캐나다 교포 화가 제이디 차(40)다.

그는 밴쿠버 에밀리 카 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왕립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시아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경험은 서구 미술계에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는 런던 화이트채플갤러리, 뉴욕 현대미술관인 모마 P21 등에서 전시를 하며 국제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그가 캔버스에 담은 소재가 흥미롭다. ‘구미호’다. 꼬리가 아홉 달린, 백년 묵은 여우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을 비하하는 비유로도 쓰인다. 하지만 교포 화가 제이디 차는 이를 가부장사회 이전의 가모장 사회의 전통으로 전복시키고, 반인반수의 신화적 이미지로 변주한다.

전시장에는 동물의 이미지와 혼재된 사회 리더로서의 여성 노인, 힘없는 잡종 동물들과 함께 있는 주변인 보호자로의 여성 노인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또 다양한 반인반수 이미지가 신화적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코로나 이후 인간 중심 사회를 반성하는 담론의 대두되는 상황이라 그의 그림이 왜 동시대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지 수긍하게 된다.

제이디 차는 밴쿠버에서 태어났고 부모가 이혼한 뒤 엄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 엄마에게 듣던 ‘옛날 옛날에∼’식 이야기는 예술가가 된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이번 전시 제목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는 엄마에게 듣던 ‘전설의 고향’식 이야기가 바탕에 있다. 하지만 전통 설화를 있는 그대로 가져 오지 않았다. 가부장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는 설화를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전복시켰다.

한국 안에서는 쉽게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 설화가 디아스포라 화가에게 소재로 채택돼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역설이 아이러니하다. 전시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12일까지. 서둘러야 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