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반찬 드리고 말벗도 되고… 명절 정 나눠요

입력 2023-09-28 04:07
충북 제천시 덕산면 ‘청년마을’에 있는 귀농·귀촌 청년이 26일 추석 명절을 맞아 마을 노인을 위해 만든 나물과 동그랑땡 등 반찬을 전달하고 있다. 제천=최현규 기자

“어르신, 저희 왔어요.” 정적을 깨우는 소리에 이일선(88)씨가 지팡이를 찾았다. 마을 청년들이었다. 문 앞에 선 청년들 손에는 손수 만든 반찬이 들려 있었다. 웃으며 반찬을 건네는 청년들을 이씨는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며 방으로 불러들였다. 믹스 커피 석 잔과 함께 담소가 시작됐다.

이씨는 방 안 가득 걸려 있는 액자를 가리키며 손주 자랑을 시작했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 얘기를 할 때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청년들은 이씨 얘기를 경청하며 함께 웃고, 또 위로했다. 이씨가 약봉지로 가득한 선반을 가리키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이제 그만 살아야지”하고 푸념하자, 한 청년은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신다. 그런 말씀 마시라”는 위로 말을 건넸다.

한참 시간을 보낸 뒤 일어서는 청년들을 이씨는 집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멀리 못 나가 미안하다”며 청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돌아가는 청년들 뒤로 “반찬 고맙다”는 이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는 이씨 모습이 보였다.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 26일 충북 제천시 덕산면 농촌공동체 ‘청년마을’에선 이미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귀농·귀촌 청년들이 모여 마을 노인들에게 전달할 반찬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들이 모인 마을 한 건물 1층 식당 안은 식용유 냄새로 가득했다.

청년들이 직접 반찬을 만드는 모습. 제천=윤웅 기자

이곳에 정착한 지 2년째인 김수영(37)씨는 전날 40분 거리의 시내로 나가 직접 장을 봤다고 했다. 청년들은 연신 동그랑땡과 너비아니를 부쳤고, 고사리와 숙주나물을 다듬었다. 한쪽에선 직접 키워서 수확한 고추를 빻아 양념을 만들었다. 곧 36개의 반찬통이 먹음직스런 음식들로 가득 찼다.

청년들은 마을 이장에게서 거동이 불편해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렵거나 혼자 끼니를 때우기 힘든 노인 36가구를 소개받았다. 이씨도 그 중 한 분이었다.

이곳 청년들은 대부분 1~2년 전 이 마을에 정착했다. 연고가 없던 낯선 곳이지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던 건 마을 어르신 덕이었다고 한다. 항상 먼저 다가와주시는 어르신들께 이번 추석엔 청년들이 먼저 다가가보자며 아이디어를 낸 게 반찬 배달이었다.

청년들은 3개 조로 나뉘어 각각 5~6가구를 방문했다. 김씨는 또래 전여진(39)씨 등 동네 청년 2명과 함께 덕산면 삼전리와 수산리를 맡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모친 임춘옥(84)씨를 모시고 사는 박덕순(60)씨의 집이었다. 박씨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왔나보다 했다”며 반가운 얼굴로 이들을 맞았다.

삼전리에 혼자 사는 임분임(86)씨는 굽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청년들을 미소로 반겼다. 임씨는 “옛날에는 명절이면 가족들만 스무 명 넘게 모여 음식을 나눠 먹었다”며 “몸이 불편해지면서 명절을 혼자 보내게 됐다. 이번에는 가뜩이나 연휴도 긴데…”라고 말했다.

청년이 방문한 노인들의 집을 점검하는 모습. 제천=윤웅 기자

청년들의 활동은 반찬 배달에 그치지 않았다. 목공소를 운영하는 김씨는 집 안을 살피며 수리할 곳이 없는지 점검했다. 처마 밑 벽지가 떨어져 보기 흉하다는 임씨의 하소연에 김씨는 “다음에 와서 손을 봐 드리겠다”고 말했다.

15년간 간호사로 일한 전여진(39)씨는 능숙하게 임씨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복용 중인 약은 무엇인지’ ‘보건소에서 받을 수 있는지’ 등을 물었다. 택시를 타고 충주에 있는 병원을 가야 한다는 말에 전씨는 “반찬 떨어지면 다시 와서 제가 직접 모시고 병원을 가겠다. 저와 약속하자”고 얘기했다.

반찬을 받은 마을 노인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청년들과 명절의 정을 나눴다. 수산리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김영록(83)씨는 청년들이 건넨 반찬을 냉장고에 넣기도 전에 굽은 허리로 방안을 바삐 돌아다녔다. 곧 다시 나타난 김씨 손에는 비타민 음료가 들려 있었다. 고령인 전연자(95)씨를 대신해 청년들을 맞이한 며느리는 밭에 있는 늙은 오이를 가리키며 “전부 따가도 된다”고 했다. 청년들이 마다하자 직접 손으로 늙은 오이 네 개를 따 건넸다.

청년이 직접 키운 고추를 수확하는 모습. 제천=윤웅 기자

정착한 지 1년 된 박유미(30)씨는 “도시에서 보내는 명절은 때로는 폭력적이다. 결혼과 취업 여부를 묻는 무분별한 질문을 견뎌야 한다”며 “반찬 배달을 하며 만나는 어르신들과는 편안하게 너스레를 떨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정윤묵(31)씨는 “명절 기간 적적함을 풀어드릴 수 있어 좋았다”며 “반찬을 드리고 오니 우리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언급했다.

청년들의 반찬 배달은 명절 이후에도 계속될 예정이다. 박씨는 “귀농·귀촌 청년들에게는 봉사 이상의 의미가 있는 활동이다”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남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함께 찾으며 마을 공동체에 스며드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제천=김재환 기자 j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