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간 미국 100대 기업의 순이익이 3% 늘어날 때 한국 100대 기업의 이익은 68%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 경기 침체와 기준금리 인상 흐름에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수출이 흔들린 탓이다. 한국 기업들이 유달리 ‘외풍’에 취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동차·배터리·조선 업종 등의 분전에도 반도체·석유화학 등 주력 수출산업의 부진이 길어지며 ‘저성장 고착화’ 우려마저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한국 100대 기업이 매출과 영업이익, 당기순이익에서 미국 100대 기업보다 큰 폭의 실적 악화를 기록했다고 25일 밝혔다. 한경협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시가총액 기준 100대 비금융기업과 한국의 코스피·코스닥 상장 시총 100대 비금융기업의 최근 1년간 상반기 실적을 비교·분석했다. 조사 결과, 미국 100대 기업의 올 상반기 매출은 3조872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4% 증가했다. 반면, 한국 100대 기업은 7463억 달러로 0.3% 느는 데 그쳤다.
수익성 격차는 더 컸다. 미국 100대 기업의 올 상반기 총 영업이익은 6385억 달러(약 853조3000억원)로 1년 새 3.9% 줄었다. 같은 기간에 한국 100대 기업의 영업이익 총액은 248억 달러(약 33조1000억원)로 63.4% 떨어졌다. 상반기 당기순이익도 미국 100대 기업은 4818억 달러로 전년 대비 3.2% 증가한 데 비해, 한국 100대 기업은 159억 달러로 68.0%나 급감했다.
한·미 기업이 엇갈린 성적표를 보인 이유는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기술(IT)과 석유화학 등 에너지 업종의 실적 차이에 있다. 한경협에 따르면 미국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의 경우 올 상반기 매출, 영업이익, 당기순이익이 1년 전과 비교해 각각 4.2%, 10.0%, 9.2% 감소하는 데 그쳤다. 이와 달리 한국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는 각각 21.5%, 95.4%, 86.9%로 큰 폭의 실적 하락세를 겪었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을 운영하는 미국의 메타플랫폼(메타)은 올 상반기에 전년 대비 9.8% 증가한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같은 기간에 한국 대표 IT기업 카카오의 영업이익은 44.9% 줄었다. 업종별로도 미국 IT·에너지 업종의 상반기 순이익 감소 폭은 각각 4.4%, 24.2%에 그쳤지만, 한국 IT·에너지 업종의 이익 감소 폭은 각각 109.4%, 100.6%에 달했다.
산업계에선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장기 침체를 우려한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통화 정책과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어 한국 기업이 생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경협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한국 기업들이 ‘기초체력’으로 버텼다. 하지만 대외 여건이 더 나빠진다면, 한계 상황에 다다를 수 있다”며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 위기 극복을 위한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가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