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각자의 생활로 분주하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로 서로 관계가 소원해져 있다면 명절은 오히려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시간일 수 있다. 앙금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사소한 말다툼이나 감정을 건드리는 언행이 있을 경우 잠재된 갈등이 분출할 수 있다. 심하면 가정폭력이나 살인, 이혼 등으로 비화돼 화목해야 할 명절이 비극으로 얼룩지거나 가족 해체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나미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7일 “이해로 얽힌 사회적 관계와 달리 혈연·결혼 등으로 얽힌 가족과는 특히 인연을 끊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때 더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가족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보루이고 쉼터라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명절은 가족 간 벌어진 틈을 메울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번 추석 연휴에 나빠진 가족·친인척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절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면 관계 개선의 가능성이 커진다. 서로 예의를 갖추고 친절하면서 인격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철현 고려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무엇보다 (자신이) 말하기 보다는 듣기, 그리고 단순한 듣기 보다는 ‘공감적 듣기’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불필요한 오해나 감정적 소모는 피하는 것이 좋다.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질문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관계 회복을 위해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다 보면 서로 오해를 하거나 상처를 주고받을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 조 교수는 “좋은 의도에서 대화를 시작했더라도 자칫 솔직한 말들로 인해 서로에게 공격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서 “조심스러운 말투와 어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간섭 탓에 관계가 소원하기 십상이다. 진정성을 갖추고 존중하는 어조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지금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좀 더 노력하겠지만, 지금도 많이 벅차다”는 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생각으로 조언이나 개입을 하기 보다는 당사자의 이야기와 의견을 존중하고 들어주는 태도가 중요하다.
형제간에는 부모님 부양이나 재산 문제와 관련해 경쟁심, 질투 등으로 생기는 이슈가 많다. 각 사안에 대해 함부로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는 신뢰에 기반한 분위기 형성이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다. 각자가 느끼는 감정을 명확히 표현하되, 상대방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부부 사이도 명절을 맞을 때마다 불필요한 오해와 감정적인 소모, 서운함 등이 뒤섞여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혼한 이상 가장 기본적인 관계 단위의 시작은 부부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매사를 한 배 탄 파트너와 함께 논의해 해결하려는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친인척간에는 대체로 의무감이나 예의 등으로 야기되는 문제가 많다. 상대방 의견을 경청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도 분명히 말해준다. 오히려 불필요하고 과도한 표현이나 주장, 개입 등이 가끔씩 보는 친인척 관계에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각자 삶의 패턴과 가치관이 굳어진 만큼,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확인하는 시기라 생각하고 굳이 정답을 제시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하는 접근은 피하는 것이 좋다.
관계 회복에 때론 시간이나 공간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명절에 조급하게 관계 회복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보다는 단계적으로 서로에 대한 앙금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조성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명절 만남에서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 경우는 대체로 상대와의 거리 조절에 실패하기 때문”이라며 “상대는 그냥 놔두길 원하고 깊은 고민이 없는 것 같은 얘기를 듣고 싶지 않은데, 굳이 그걸 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서로 간의 거리에 대해 느끼는 정도가 비슷해져야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철현 교수는 “명절 때는 어수선하고 경황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깊이있는 대화를 통한 관계 개선에 적합하지 않은 시점일 수 있다. 만일 명절 풍경을 예상했을 때 진심어린 대화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명절 전이나 후에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택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고 조언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