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추행죄, 공포심 유발해도 성립”… 40년 만에 판례 변경

입력 2023-09-22 04:03
국민일보DB

대법원이 강제추행죄가 인정되려면 ‘저항 곤란 상태’가 전제돼야 한다는 기존의 판단 기준을 깨고 처벌 범위를 넓히는 새 판례를 제시했다. 1983년 관련 법리가 정립된 지 40년 만의 판례 변경이다. 대법원은 지금까지의 판례가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을 토대로 변경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20대 A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22일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참여한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였다.

A씨는 2014년 8월 사촌 B씨(당시 15세)에게 “만져 달라”며 왼손을 잡아 끌어당긴 혐의를 받는다. B씨가 거부하자 양팔로 안아 침대에 쓰러뜨렸고, B씨 신체 부위를 30초간 만졌다. B씨가 팔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방문을 나가려 하자 뒤따라가 B씨를 1분 동안 끌어안은 것으로 조사됐다.

법원 판례는 강제추행을 두 종류로 나눈다. 먼저 ‘기습추행’은 상대방 의사에 반한 신체접촉이 있으면 죄가 성립된다. 또 다른 유형은 폭행이나 협박이 추행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는 ‘폭행·협박 선행형’이다. A씨 사건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게 기존 판례였다.

1심은 A씨가 추행 전 저항 곤란을 야기하는 폭행·협박을 행사했다고 보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만져 달라” 등의 말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말로 보기 어렵다며 1심 판결을 파기했다. A씨가 침대에 눕히거나 양팔로 끌어안을 때 B씨가 저항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힘의 행사 정도도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은 아니었다고 봤다. 강제추행은 무죄가 선고됐고, 예비적 공소사실인 아동청소년 위력 추행이 유죄로 인정돼 벌금 1000만원이 내려졌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저항이 곤란할 정도의 강력한 폭행·협박’을 요구하는 기존 판례를 폐기했다. 대법원은 ‘상대방 신체에 불법한 힘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고 추행한 경우 강제추행죄가 성립된다’고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저항 곤란’ 상태를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정조’ 수호 요구를 전제하고 있고,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분명히 한 형법 개정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A씨가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것에 해당한다고 보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돌려보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