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 한 대가 바닥을 평평하게 다지고 있었다. 공사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작업자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불도저엔 탑승 공간인 ‘캐빈(cabin)’이 아예 없었다. 이 불도저는 지난 20일 충남 보령시에 자리한 HD현대인프라코어 성능시험장에서 시간당 70㎜의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무난하게 평탄화 작업을 수행했다. 한 직원이 후진하던 불도저에 다가서자 알아서 정지해 사고도 예방했다.
바로 옆 흙더미에선 굴착기가 흙을 파내고 있었다. 여기에도 탑승자는 없었다. 악천후로 통신 문제가 발생해 굴착기는 잠시 멈추긴 했지만, 이내 작동한 뒤 ‘보란 듯이’ 흙을 퍼냈다.
무인 항공기, 무인 자동차에 이어 무인 건설기계가 성큼 다가왔다. 대형 재난사고 현장, 해발 2000m 이상의 고산지대와 같이 사람이 작업하기 어려운 곳에서 건설기계가 알아서 일하는 시대가 곧 열린다.
HD현대인프라코어에서 언론에 공개한 장비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는 ‘무인 자동화’ 기능을 탑재한 건설기계들이다.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인공지능(AI) 수준에 이르진 못했다. 하지만 작업자가 없어도 되고 필요하면 원격제어 콘솔이나 위성통신을 이용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조종할 수 있다.
김동목 HD현대사이트솔루션 기술원 수석연구원은 “무인 기계 시연을 본 딜러와 고객사에서 ‘터미네이터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등 반응이 좋다”고 전했다.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HD현대인프라코어의 모회사다. 이 회사의 무인 자동화 기술 개발역사는 10년째를 맞았다. 지난 2014년 정보통신기술(ICT) 전환 흐름을 타면서 연구에 나섰다. 2016년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콘셉트-X’라는 무인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2019년 11월에 무인 건설기계를 세계 최초로 시연했다.
올해엔 업그레이드 버전인 ‘콘셉트-X2’를 내놓았다. 그동안 굴착기와 휠로더만 무인화했었다면, 이번엔 무인 기능을 탑재한 불도저를 선보였다. 굴착기엔 틸트 로테이터(Tilt Rotator) 기능을 추가해 사람보다 더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언제쯤 상용화할까. 원격제어 콘솔부터 나온다. 내년 상반기 중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해외 경쟁사도 출시를 앞두고 있어 시장이 커질 전망이다. 관건은 가격이다. 무인 건설기계엔 라이다, 열화상 카메라, 위성측위시스템(GNSS), 감지기 등의 최첨단 고가 장비를 탑재한다. 숙련 기술자보다 작업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규모의 경제’가 이뤄지면 부품 가격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본다. 작업능력도 지금은 기술자의 90% 수준이지만, 8시간 근무하는 사람과 달리 기계는 정비시간을 뺀 21~22시간 작업이 가능한 점을 경쟁력으로 꼽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 ‘네옴시티’에서도 무인 건설기계를 볼 가능성이 있다.
이동욱 HD현대사이트솔루션 대표는 “여러 건설사와 대형 현장에 도입하는 것을 협의하고 있다”며 “네옴시티에서도 이 기술을 도입해주길 바라고 있다. 네옴시티 관련 실증 사업부터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보령=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