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엔 진상 갑질… 등뒤엔 가족 생계 [이슈&탐사]

입력 2023-09-21 04:09
한 대형은행의 인터넷뱅킹 로그인 장애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 은행 콜센터 상담사들에게 하달된 고객 응대 요령. 지시를 직접 받은 콜센터 상담사가 본보에 화면을 보내 왔다.

감정노동을 유발하는 계기는 일터 밖 소비자의 갑질이지만, 감정노동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업장의 방관과 동참이다. 많은 감정노동자는 “고객은 차라리 견디겠다. 사업장이 더 나쁘다”고 말한다. 관리자들은 맨 앞에서 외부의 불만을 감당하는 콜센터 상담사, 경비노동자, 백화점 판매직들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재량권 대신 “고객 불만 평가를 실적에 반영한다”는 지침을 줬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한 여성은 “눈앞에는 갑질, 등 뒤에는 생계 위협이 있다”고 말했다.

이익만을 최우선 고려하는 사업장은 때론 고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과를, 때론 사실과 동떨어진 대응을 주문하는 식으로 노동자를 벼랑 끝에 내몬다. 한 대형은행 콜센터 상담사들은 2019년 인터넷뱅킹 로그인 장애 사태 당시 사측으로부터 ‘당행 시스템 장애 언급 금지’ 공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시스템 장애를 빌미로 보상 요구가 다분해 시스템 장애 언급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콜센터 상담사들에게 전파된 응대방안은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양해 말씀을 드린 후 보상 요구하시는 고객께는 ‘익일 소비자보호부 접수 안내 부탁드립니다’”였다.

이는 명백한 문제 상황에서 금전적 손해를 염두에 둔 사업장이 고객의 항의와 분노를 말단 노동자에게 몰아버린 사례다. 이 경우 감정노동자는 사측 권고에 따라 문제를 빙빙 돌려 답할 뿐이지만, 고객은 이들에게 “앵무새냐” “인공지능(AI)을 틀어놓은 거냐”고 폭언한다. 사업주가 책임을 덜려 고객의 갑질과 말단 직원의 감정노동을 부추기는 일은 직역을 가리지 않고 국민일보에 증언됐다.

경기 지역 한 아파트의 경비노동자가 국민일보에 보내온 근무 평가표에는 관리자가 감정노동을 부추기는 구조가 드러나 있었다. 복무규정과 근무실태 등 6개 항목을 총 100점으로 평가, 70점 미만을 업무 부적격자로 판정하는 평가표였다. 눈에 띄는 대목은 감점의 사유였다. 관리자는 경비노동자와 주민 사이 언쟁이 있기만 해도 5점을 감점했고, ‘친절’ ‘인사’ 따위의 계량화하기 힘든 항목도 감점요소로 적용하고 있었다. 이는 주민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점을 받을 수 있는 형태였다. 여전히 많은 아파트 경비노동자가 입주민 차량에 고개를 숙이는 풍경에는 이러한 평가표가 있었다.

감정노동은 일터 약자의 생계를 볼모로 잡아 계속된다. 사업장의 '을'끼리 또다시 갑을을 나눠 감정노동을 떠넘기고, 서로 분노한다. 한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는 A씨는 "입주민들이 공동주택관리법에 어긋나는 가욋일 요구를 할 때가 많지만, 이를 거부하면 관리업체에 '소장을 교체하라'는 압력이 들어온다"고 했다. B씨는 "업체에서는 재계약을 따내기 위해 입주민의 부당한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하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은 관리소장이 진다"고 말했다.

일부 관리자는 감정노동자의 몸부림을 이해하긴커녕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수도권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일하는 8급 공무원 B씨는 지난겨울 상사로부터 "일도 똑바로 못하는 너 같은 XX는 민원 보면 안 된다"는 폭언을 들었다. 마스크 없이 센터에 들어온 민원인에게 "마스크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가 언쟁을 벌인 뒤 들은 말이었다. B씨는 "감정노동자로서 보호받을 권리를 주장하다 보면 인사평가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신분으로 분류된 플랫폼 노동자들은 사측이 고객으로부터 낮은 '별점'을 받은 배달 노동자에게 '똥콜'(드나들기 어려운 지역의 배달)을 몰아주거나, 콜 자체를 줄인다고 의심한다. 사측은 그런 일이 없다면서도 콜 배정 알고리즘을 공개하지 않았고, 노동자는 일단 고객의 불만을 두려워해 막무가내 갑질에도 고개를 숙인다. 선동영 한국노총전국연대노조 플랫폼배달지부 지부장은 "사측은 부정하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은 불이익을 체감한다"고 했다.

올해 입주가 이뤄진 서울 강남구의 한 신축 아파트에서는 경비노동자가 배달 오토바이를 막아서고, 배달업체 직원은 오토바이를 세운 뒤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계속됐다. 입주자대표회의가 배달 오토바이를 단지에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결정 맨 아래에서, 이 사회의 감정노동자들끼리만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 아파트에 배달해본 경험이 있다는 C씨는 "비 오는 날이면 배달 음식이 비에 다 젖는다. 입주민 결정임을 알지만 예외 없이 막는 경비원도 야속하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김지훈 정진영 이택현 이경원 기자 germany@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