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만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회담에 대한 언론 분석에 풍전등화의 동북아시아가 담긴 듯하다. 1년 넘게 이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둘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전쟁으로 성사된 만남이 또 다른 긴장을 빚는 현실이 역설적이다.
인류 역사는 전쟁의 총합과도 같다지만 충돌만큼이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도 뒤따랐다. 갈라진 틈을 메우는 데 음악이 사용된 예가 유독 많았던 것도 눈길을 끈다.
지난 13일은 오슬로협정 3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1993년 9월 13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맺은 평화협정이다. 이 공로로 이듬해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 등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협정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노르웨이에서 열렸는데 이를 주관했던 유네스코는 대중음악가 치코 부치키에게 공연을 부탁했다. 세계적 명성의 ‘집시킹스’ 창립 멤버였던 그를 초청한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단 중 11명이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 ‘검은9월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스라엘은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을 앞세워 90년대 초까지 테러 관련자들을 추적했고 암살했다. 이 과정에서 오인 암살이 있었다. 73년 7월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의 한 식당 웨이터인 아흐메드 부치키를 주범 알리 하산 살라메로 착각하고 말았다. 치코 부치키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의 동생이었다. 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그는 “형의 죽음과 관계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상 앞에서 연주하면서 작은 다리를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용서라는 이름’을 지녔다”고 말했다.
갈등을 음악으로 감싼 예는 또 있다. 73년, 적대 관계이던 미국과 중국 사이에 데탕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미국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가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당시 오케스트라는 중국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담긴 피아노 협주곡 ‘황하’를 중국 피아니스트 인첸종과 협연했다. 피날레는 존 필립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였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지난해 5월 평화의 선율이 전장을 갈랐다. 르비우국립교향악단은 40년간 이어오던 연례 여름축제를 열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약상자나 구급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바로크 양식의 공연장이 구호품 보급소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신나는 곡으로 시작하던 예년의 연주회와 달리 오케스트라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연주자들 중에도 4명이 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뒤였다.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들의 바람은 오직 평화였다. 갈등의 현장, 아픔의 자리에 음악이 주는 위로가 있다.
아쉬운 건 이런 순간이 작은 비늘조각처럼 보잘것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점이다. 오슬로협정 당사자였던 라빈 총리는 암살당했고 양측은 더욱 강력한 무기와 테러로 여전히 서로를 할퀴고 있다. 미·중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 관계가 형성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평화와 대치를 반복하는 남북 관계도 마찬가지다. 갈라진 한반도에는 더 이상 서로를 향한 평화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이념을 넘어 평화를 향한 길을 냈던 화음이 진토가 돼 버렸고 갈등과 긴장, 대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평화를 향한 시간은 유독 더디게 흐른다. 낙담은 포기를, 포기는 단절을 낳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노래의 날개 위에 평화의 선율을 싣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풀어야 할 과제다. 지금 우리는 평화가 가장 필요한 시간 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