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염수 방류로 활명수 슬로건 떠올라…
‘안전한 방사선량’이 있기는 한 건가
‘안전한 방사선량’이 있기는 한 건가
1897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는 왕의 나라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황제의 나라가 됐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일제와 제국주의 열강의 아귀다툼 속에서 근대적 주권 국가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은 이 땅에 최초의 국산약이 제조 발매된 해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 ‘활명수’.
올해로 126년을 맞는 최장수 기업인 동화약품 브로슈어에 의하면 활명수는 궁중선전관 출신 창업주가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것이다. 동화약품의 부채표와 활명수는 국내 최초의 등록상표와 등록상품이다. 1910년, 그 시절에 상표 등록을 했다니! 한국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활명수를, 특히 탄산이 함유된 까스 활명수를 만병통치약처럼 마시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마셨던 까스 활명수는 대체 몇 병이나 될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풍요의 주문처럼 노래하던 90년대의 추석 연휴, 기름진 음식으로 과식한 배에도 이만한 소화제가 없었다.
‘살릴 활(活) 생명 명(命) 물 수(水)/ 궁중에서 태어나 죽어가던 사람들을 살리던 물/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물/ 나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다.’ 2015년 이후 활명수가 집행한 매니페스토 광고 카피는 활명수라는 브랜드의 의미와 가치를 간명하게 짚어내며, 젊은 세대들에게 자칫 과거의 브랜드로 낙인찍히기 쉬운 장수 브랜드를 새롭게 재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단순한 소화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물. 제아무리 날고 기는 신생 제품들이 출시돼 경쟁한다고 해도 궁중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고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물,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해온 숭고하고도 친근한 물에 비할 수 있겠느냐는 은근한 자부심. 실제 동화약품, 당시 동화약방을 창업한 이들은 활명수 판매대금을 독립자금으로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에 있는 동화약품 본사 자리는 옛 창업지 그대로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서울 연통부’가 있던 자리다. 서울 연통부 책임자가 당시 동화약방 사장이었다.
이후 활명수는 힙합 프로그램과도 협업하고 청바지 브랜드 게스, 맥가이버 칼이라 불리는 스위스 빅토리녹스, 아웃도어 브랜드 스탠리 등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여전히 액제 소화제 시장 매출 1위이고, 일반의약품 중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선택한 약품으로 꼽히고 있다. 다시 추석을 앞두기도 했거니와 뱃속 소화불량보다 백만 배쯤 더 심각하고 중대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시절이어서인지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활명수의 슬로건이 떠올랐다.
해양생태계에서 시작해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모든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물, 바닷물이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방류로 위협받고 있다. 지난달 24일 개시된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1차 방류로 7800t이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올해 안에 4번, 그리고 30년 이상 134만t에 이르는 오염수 방류를 계속한단다.
한국 정부는 국민 세금을 들여 오염수 안전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국무총리의 말처럼 우리 정부가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를 ‘과학적으로 처리된 오염수’라고 부르든 말든, 도쿄전력의 다핵종제거설비를 ‘알프스’라 부르든 말든, 인류가 지금껏 한 번도 바다로 흘려보낸 적 없는 엄청난 양의 방사성 오염수가 전 세계 바다에 방류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과학적으로 안전한 방사선량이 있기는 한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물. 독립 운동가를 살리고, 지구의 생명을 살리는 물이 간절해진 시대. 답답한 속에 소화제라도 마셔야겠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