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할머니의 일기장

입력 2023-09-20 04:05

모처럼 쉬는 주말 저녁, 수년 전 방영했던 한 TV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됐다. 주인공은 문해학교를 다니는 할머니였다. 문해학교는 생계나 상황의 어려움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받는 곳이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한글을 배우고 이제야 정말 눈을 떴다고 봄날의 꽃처럼 만개한 웃음을 지었다. 6·25전쟁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족 하나 없이 혼자 남았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일했고 자식들 입히고 가르치느라 공부할 새가 없었다. 사는 동안 못 배운 한이 커서 많이 울었다 한다. 할머니의 굽은 등은 당신이 견뎌온 세월과 한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전하는 할머니는 어찌 저리 해맑은 표정을 지으실 수 있을까.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엄두도 못 낸 채 자꾸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가 일기장을 펼쳤다. 주름진 손으로 연필을 들어 또박또박 한 글자씩 써 내려갔다. ‘부족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아휴, 참았던 눈물샘이 터졌다. 숱한 고생을 하며 모진 삶을 살아왔음에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을 거라는 할머니의 진심은 나를 울렸다.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다고 웃는 할머니는 배움의 기쁨에 들뜬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또 한편으론 살아온 인생만으로도 교훈을 주는 스승의 모습이었다. 더 일찍 배우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라도 배울 수 있어 다행이라는 할머니. 황혼이 돼서야 청춘을 맞은 할머니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가 나온 지 한참이 돼도 먹먹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일기장을 꺼내 할머니의 일기를 그대로 따라 적었다. ‘부족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음 말을 이어 적었다. ‘이렇게라도 할머니를 뵙게 되어 기뻐요. 나도 당신처럼 희망을 노래하는 할머니가 될게요.’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