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아들의 자동차를 고치며

입력 2023-09-20 04:02

어제는 새벽 두 시까지 둘째 아들의 자동차를 고쳤다. 병원 일 때문에 열 시가 훌쩍 넘어 퇴근했는데 둘째가 풍선과 빨대, 젓가락 같은 재활용품을 모아 뭔가 조잡한 것을 만들고 있었다. “그게 뭐야?” “자동차예요.” 아무리 봐도 그냥 쓰레기 집합체로 보인다.

동네 영어 학원에서 과제로 풍선 자동차를 만들기로 한 모양이다. 바람을 넣은 풍선에서 공기가 빠질 때 생기는 추진력으로 달리는 자동차다. 두루마리 휴지 심지에 빨대와 풍선을 연결해 엔진을 만들고, 나무젓가락과 생수병 뚜껑으로 바퀴를 만들었다. 나름 아이디어를 짜내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만든 모양인데, 초등학교 4학년 솜씨답게 엉성하고 조잡하다. 척 봐도 전혀 움직일 거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자동차는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둘째가 울상이다. “8푸트(foot)를 넘겨야 하는데, 내 자동차는 1푸트도 안 움직여요.” 옆에 있던 첫째가 키득거린다. “8피트(feet)겠지.” 피트가 발 크기를 기준으로 만든 단위라는 걸 배우기는 한 거 같은데, 어설프게 외운 모양이다. 아이가 끙끙대는 모습을 보니 밤을 새워도 해결이 될 거 같지 않아 내가 나서기로 한다.

호기롭게 나섰는데 웬걸, 이리저리 만져봐도 자동차는 그냥 꿈틀대다 멈춰버린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면서 움직이는 단순한 원리인데 영문을 모르겠다. 슬슬 피로가 몰려온다. ‘내일 오전에 외래 진료여서 빨리 씻고 자야 하는데, 괜히 나섰네.’ 와이프는 둘째에게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재촉이다. “준아, 그냥 내일 다시 만들까?” “이거 내일까지인데… 그럼, 내일 가서 친구들한테, ‘얘들아, 내 자동차는 잘 안 움직여’라고 말하면 되는 거지?”라며 눈물을 글썽인다. “선생님께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제 거는 안 움직여요’라고, 말할게.” 아, 세상 슬픔이 모두 담겨 있는 둘째의 눈망울을 보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나와 같이 끙끙대다가 구부러진 빨대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들고, 나만 혼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졸려 죽겠는데, 둘째의 실망한 얼굴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잘 수 없어 유튜브에서 풍선 자동차를 검색해 몇 번이나 돌려본다. 바람이 잘 빠지는 걸 보면 엔진 문제는 아닌 거 같고, 빨대가 멀쩡하니 동력전달장치도 괜찮고. 재활용 쓰레기를 뒤져 부품을 교체하고 이리저리 뜯어고쳤더니 드디어 자동차가 쾌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두 시가 훌쩍 넘어 잠자리에 든 후 밤에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새벽 여섯 시에 출근하고, 외래 진료와 여러 회의 때문에 꽤 피곤한 하루였는데, 아이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가 겪었던 희로애락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일이다. 내 어린 시절은 기억 속에서 빛이 바래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내 과거의 삶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주돼 다시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밤늦게까지 끙끙대던 내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꿈꾸고 좌절하고 고집부리고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의 눈망울에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찾아낸다. 이렇게 몇 개의 삶이 중첩되면서 인생이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풍선 자동차보다 더 큰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유전자와 사랑하는 사람의 유전자가 절반씩 조합된 개구쟁이 꼬마는 어려움을 혼자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독립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할 새로운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소박하면서도 경이로운 삶의 원리다.

병원 일을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퇴근했는데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달려온다. “아빠, 자동차가 엄청 빨리 달렸어요.” “그래, 8푸트 넘겼어?” “에이 아빠, 8푸트가 뭐야, 8피트지!”

고경남(서울아산병원 교수·소아청소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