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아픔 스민 자리에 피어난 예술… ‘동양척식 대전’ 문화공간 재탄생

입력 2023-09-19 18:43 수정 2023-09-19 21:58

1922년에 대전 동구 인동에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석조 건물(사진)이 100년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예술의 향기를 전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국책 회사로 1908년 경성 본점에 이어 목포, 부산, 대전 등 전국 교통 중심지에 지점이 세워졌다.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된 이 건물은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뀐 끝에 2020년 씨엔시티에너지가 인수했다. 씨엔씨티마음에너지재단은 복원 작업을 마무리하고 지난해 12월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을 준공했고 올해 3월 임시 개관에 이어 이달 8일 정식 개관했다.

안젤금 키퍼 개인전 전경. 헤레디움 제공

헤레디움은 개관전으로 독일의 신표현주의화가 안젤름 키퍼(78) 개인전 ‘가을’을 마련해 최근 개막 행사를 가졌다. 1980년 제39회 베니스비엔날레 서독관 대표 작가로 선정된 키퍼는 이후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누리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구겐하임 빌바오,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 동시대 미술의 거장이다. 그는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중 두칼레궁에서 가로 24m, 세로 7m 작품 등 천장 높은 궁전 벽면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규모의 전시를 해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이번 전시는 키퍼가 국내에 최초로 선보이는 신작을 포함해 총 18점으로 구성된 국내 역대 최대 규모다. 전시장에는 늦가을의 스산함, 생명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갈색 톤의 풍경화 작품으로 채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 연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검은 색, 갈색 물감으로 표현주의적인 제스처의 붓질을 한 캔버스에는 납으로 만든 낙엽이 오브제처럼 붙어 있기도 하다. 키퍼는 암갈색 물감 사이사이 금박을 저미듯 붙이기도 했는데, 이는 가을이 생명의 소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 생명이 탄생하는 봄으로 이어짐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로 읽힌다.

전시장 2층 한 가운데는 황토와 짚으로 만든 벽돌을 사용한 쉼터 작품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쉼터조차 허물어지고 퇴락한 모습으로 연출이 돼 벽에 걸린 회화의 퇴락한 분위기와 조응한다.

헤레디움 함선재 관장은 “폐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작품의 의미가 수탈의 장소를 소통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헤레디움의 공간적 의미와 연결되는 전시”라며 “헤레디움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 현대미술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라고 말했다.

대전=손영옥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