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수(65) 부산 수영교회 목사는 유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매년 수차례 제사를 지내는 집안 분위기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유교 사상에 익숙했던 유 목사의 삶이 변화된 것은 경남 거창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교육자인 전영창(1917~1976) 선생으로부터 복음을 접한 뒤 그는 ‘일생을 복음 전파에 헌신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살아
지난 14일 부산 수영구 교회에서 만난 유 목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며 “주일마다 교회가 없는 시골 마을로 들어가 아이들 앞에서 설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별명이 ‘유 목사’였다”고 웃었다.
기독교학교인 거창고 학생들은 공부뿐 아니라 복음 전파에도 열심이었다. 그 역시 등에 강냉이를 담은 포댓자루를 들고 북을 치며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을 전했다.
“여기는 어린이 전도대입니다. 집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 부모님 애먹이는 어린이들 다 보내주세요. 착하고 훌륭한 어린이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당시 호객 멘트를 줄줄 외울 정도로 거창고에서의 신앙생활은 그의 영성을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유 목사는 부산 고신대와 고신 신대원을 졸업한 후 1986년 창원 유산교회에 부임했다. 사례비는 12만원, 교회학교부터 장년까지 혼자서 목회해야 하는 시골교회였지만 매 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어느 날 교회 장로가 패혈증으로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 놓였다. 큰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유 목사는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매주 한 차례 병문안을 가며 그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한 달여가 지났을까. 기적적으로 장로님이 깨어났다.
또 하루는 그가 사례비를 받는 날이었다. 회계 집사의 어린 딸이 돈 봉투를 달랑달랑 들고 와서는 ‘아빠가 이거 갖다 드리래요’ 하고 돌아섰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싶어 자존심이 상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한바탕 엎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는 집사에게 말했다. “집사님,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자 사례비까지 챙기기 힘드시지요. 다음에 제 사례비를 가져오시면 제가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이 두 사건은 그가 평생의 목회 철학을 정립하게 된 계기였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살리신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연약한 목회자를 사용하실 정도로 작은 교회까지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집사님과의 사건을 통해서는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목회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첫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신 것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목회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피스메이커’로 치유한 교회 갈등
부산서면교회 부목사를 거쳐 1994년 동래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는 70명이 모이던 교회를 4배 넘게 부흥시켰다. 새 성전에 입당하고 병 고침의 역사가 일어나는 등 15년간 은혜롭게 목회를 하던 때였다. 당시 분란을 겪고 있던 수영교회로부터 청빙이 왔다. 굳이 잘 되는 교회를 떠나 어려운 교회로 갈 이유는 없었다. 그때 거창고에서 배운 ‘직업 선택 10계명’이 떠올랐다.
“10계명 중에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등의 항목이 있어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바로 수영교회로 갔죠.”
그가 2007년 수영교회에 부임했을 때 성도들은 서로 고소·고발을 하려고 예배 시간에 헌법을 읽고 있을 정도로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기도회를 열어 성도들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사람을 향해 입을 벌리지 말고 하나님께 입을 벌려 간구하라’는 취지였다.
또 성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마음을 어루만졌다. 15년 동안 준중형차를 타고 다니면서 목회자의 본을 보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 결과 교회의 갈등은 서서히 회복돼 104년 교회 역사가 원만히 이어져 오고 있다.
유 목사가 분란이 심한 교회를 정상화했다는 게 알려지자 지역 교계와 연합기관에서도 그를 찾아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부탁했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본부장, 부산극동방송 목회자자문위원회 위원장,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부산지역 이사장을 거쳤다. 부산의 ‘큰 형님’으로 지역 후배 목회자들까지 챙겼다. 현재는 청소년 단체인 틴스토리와 고신대 이사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성도들이 내 맘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조언을 구해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해요. 어린아이는 말도 잘 안 듣고 따라오라고 해도 오지도 않죠. 그럴 땐 아이를 업으면 내가 원하는 데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목회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업어서 지고 가는 것입니다.”
부산=글·사진 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