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의 시대는 축복이 아니라 기복의 변명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길이냐 제국의 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가? 기독교 제국이면 되지 않는가?” 이런 혼합주의 신앙이, 축복과 기복의 차이가 현기증과 멀미를 일으키는 시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목축의 신이고 바알은 평야와 농업의 신이니 균형을 이루면 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며 자기 합리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습을 50%의 죄, 절반의 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절반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가증히 여긴 죄였습니다.
마치 배우자가 “내가 당신을 위해 자녀를 낳고 잘 양육하며 집안일에 최선을 다하고 부요한 가정생활을 위해 일도 열심히 하며 외모도 최선을 다해 꾸밀게. 하지만 당신 말고 다른 배우자를 2명만 더 사랑하며 지낼 수 있게 해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셨습니다. 당연히 심판과 분노의 불길만 가득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메시지 대신 오히려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투사가 아니라 연인이 되게 하십니다. 막강한 전투력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원하십니다. 분노하기 전에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호세아는 온전히 순종합니다. 그러면 호세아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억지로 고멜과 중매결혼을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멜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호세아 자신이었습니다. 호세아는 기계적으로 시키는 대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고멜을 선택해 사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음란한 여인 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호세아도 사랑으로 고멜에게 다가갔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호세아의 길은 억지로 중매 결혼한 순종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한 길이었습니다. 고멜이 부정한 아이를 낳을 때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내가 그들을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아니하리라.” 이 심판의 예언은 항상 ‘그러나’로 이어지며 사랑과 긍휼이 가득한 구원의 예언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구원하리라. 너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세아는 음란의 열매를 오히려 사랑과 용서의 열매로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호세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가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호세아가 돼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를 선언해야 할 시대에 투사와 전사만 가득합니다. 지금은 교회의 전투력과 투지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눈물과 사랑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투사 이전에 사랑하는 연인이 됩시다. 사랑하지 않으면 말하지 맙시다. 사랑하기에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핏덩이 이스르엘과 로루하마와 로암미를 품에 안고 서슬이 시퍼런 심판을 선언하면서도 “그러나”를 외치는 아비 된 호세아의 목 매임이 우리의 사랑이 되길 축복합니다.
송병주 목사(LA 선한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는 LA 선한청지기교회 담임목사로 이민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며 생활신앙을 격려하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KOSTA USA 공동대표로 미주 장신대 설교학 교수로 섬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오후 5시에 온 사람’(규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