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입력 2023-09-17 20:14
대만의 글로벌 히트작 ‘상견니’를 한국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넷플릭스 시리즈 ‘너의 시간 속으로’가 지난 8일 공개됐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남자친구 구연준(안효섭)을 그리워하던 주인공 한준희(전여빈)가 1998년으로 타임슬립(시간여행)을 해 연준과 똑같이 생긴 남시헌을 만나면서 겪게 되는 미스터리 로맨스다.


준희는 2023년을 살고 있는 서른여섯 살 직장인이다. 연준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던 그에게 어느 날 의문의 카세트테이프와 워크맨이 담긴 택배가 온다. 음악을 들으며 잠에 빠진 준희는 1998년을 살고 있는 고등학생 권민주가 된다. 외모는 같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민주는 내성적이지만 준희는 발랄하고 자기 감정이나 의사 표현이 확실하다. 당찬 준희의 매력에 시헌은 빠져든다.

그러나 민주가 살해당하고, 시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이들의 운명은 소용돌이 친다. 정해진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두 사람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어느 시간대에, 어느 장소에 있든 서로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운명을 바꾸기 위해 부던히 노력한다. 과연 민주와 연준, 시헌은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너의 시간 속으로’의 김진원 감독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참 좋은 시절’ ‘너를 기억해’ ‘그냥 사랑하는 사이’ ‘나의 나라’를 연출했다. 원작인 ‘상견니’는 워낙 팬이 많은 작품이다. 리메이크에 대한 부담감이 클 법했다. 한국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원작이 가진 특유의 매력도 살려야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너의 시간 속으로’를 연출한 김진원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감독의 아버지는 ‘용의눈물’ ‘무인시대’ 등 대하사극에서 열연을 펼친 김흥기씨다. 김 감독은 연출자로서 아버지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연출작을 하기 1년 전 부친이 별세하면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김 감독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조금씩 아버지를 녹여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넷플릭스 제공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대만 원작을 봤을 때 그는 반짝반짝한 청춘 로맨스 같으면서도 반전이 거듭되는 사건 전개가 흥미로웠다고 전했다. 민주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과연 연준은 진짜 죽은 게 맞는지, 시헌과 연준은 어떤 관계인지가 후반부로 갈수록 밝혀진다. 김 감독은 “전체적으로 멜로의 틀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시간대를 오가면서 다양한 장르적 특징이 복합되는 작품”이라며 “예상을 깨면서 진행되는 게 보는 사람의 궁금증을 일으킨다”고 소개했다.

1988년의 시대적 배경과 정서를 재현하기 위해 공도 많이 들였다. 타임슬립의 매개체인 워크맨은 그 시대의 추억을 환기한다. 극 중 주요 장소인 레코드숍은 김 감독이 가장 공들여 섭외한 곳 중 하나다. “민주와 시헌이 다니는 학교는 시대감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했어요. 서울 중앙고는 최불암 선생님이 졸업한 곳이에요. 레코드숍 자리도 한참 찾았죠. 전주에서 화가분이 작업실로 쓰던 공간을 섭외해 리모델링했어요. 촬영 초반부터 거의 1년 가까이 주요 장소들을 찾아보며 더 좋은 장소를 발굴하려 애썼어요.”

이 작품의 시그니처 OST는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1996)다. 이 곡을 들으면서 준희는 타임슬립을 한다. 이외에도 뉴진스가 리메이크한 ‘아름다운 구속’(원곡 김종서), 멜로망스 김민석이 부른 ‘네버 엔딩 스토리’(원곡 부활), 홍대광의 ‘사랑과 우정 사이’(원곡 피노키오) 등이 삽입됐다. “1998년이 배경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온 곡을 선별했어요. 그러면서 현대 시간대(2023년)에도 어울릴 수 있고 극의 내용과 부합되는 곡이어야 했죠. 레코드숍 상호가 ‘27레코드’인데, ‘가수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음악은 남아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의미를 담았거든요. 서지원의 음성과 음악이 그런 의미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 눈물 모아’로 정했어요.”


‘너의 시간 속으로’의 엔딩은 원작보다 좀 더 희망적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시헌과 준희는 운명을 바꾸기 위한 작은 선택을 해나간다. 김 감독은 “작가님이 ‘작은 선택의 순간이 모여서 삶을 이루게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가능성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차용했다”고 언급했다. 어떠한 선택을 할 때마다 그만큼의 새로운 우주가 파생되고, 이렇게 파생된 우주가 쌓여가면서 삶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엔딩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남자 주인공인 안효섭은 예전부터 함께 작품을 하고 싶었던 배우라고 했다. 안효섭은 직전에 로맨틱 코미디 ‘사내맞선’에서 직원과 사랑에 빠지는 기업 사장을 연기하며 시청자들을 설레게 했다. 이어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2에서는 의사로서 성장하는 서우진 역을 소화했다.

김 감독은 안효섭에 대해 “코믹한 연기나 장난기 있는 역할도 잘하는데 진지하고 남자다운 느낌도 있다”며 “우리 작품을 통해 그전에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김 감독의 직전 작품은 2019년 방영된 ‘나의 나라’다. 거의 4년 만에 새 작품으로 돌아왔다. 20년 가까이 연출을 해왔으나 리메이크는 처음이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와 작업도 생소했다. 최근 몇 년간 OTT의 영향력이 커지며 촬영 현장에서도 변화를 느꼈다. 김 감독은 “예전과 달리 훨씬 더 많은 분업화가 이뤄지고 준비과정, 후반 작업도 많아졌다”면서 “생소해서 어렵기도 하고 재밌었다”고 전했다.

넷플릭스의 영향력도 실감했다. 그는 “최근에 했던 작품 중에 연락을 가장 많이 받았다. 넷플릭스라서 그런가 싶었다”며 웃었다. 초반 성적표도 나쁘지 않았다. 지난 11일 기준 이 작품은 넷플릭스 TV 시리즈 부문에서 8위에 올랐다.

‘상견니’를 의식해 부담감이 컸던 김 감독도 한시름 놓았다. 그는 “대만에서 3위, 일본에서도 3위라고 들었다”며 “원작 때문에 반응이 궁금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원작의 대만 배우들도 응원하며 힘을 보태줬다.

2003년 KBS에 입사한 김 감독은 JTBC를 거쳐 현재 콘텐츠 제작사 스튜디오플로우에 있다. 그가 처음에 연출자가 되고자 한 데는 아버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고(故) 김흥기 배우다. ‘장희빈’, ‘임꺽정’, ‘무인시대’ 등 주로 대하사극에 열연했다. 김 감독은 연출자로서 아버지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연출작을 하기 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아쉬움이 컸던 그는 “내가 만드는 작품에 조금씩 아버지를 녹여왔다”고 귀띔했다.

“제 입봉작인 KBS2 드라마스페셜 ‘마지막 후뢰시맨’에서 이성민 배우가 TV를 켜놓고 잠드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TV 화면에 아버지가 나와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때는 송중기 배우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에 아버지 사진을 썼죠. 이번 작품에서는 연준의 가족사진에서 연준의 아버지로 스치듯 잠깐 나와요.”

이 작품으로 그가 시청자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일까. 그는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결국 운명은 작은 선택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각자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전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