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장인 정신과 먹고사니즘

입력 2023-09-15 04:08

“요즘은 영화판도 예전이랑 달라졌어요. 장인 정신(匠人 精神) 같은 게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최근 술자리에서 한 영화업계 종사자가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엔 한 작품을 만들면서 각각의 영역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에게 공동의 목표의식이 있는 게 당연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현장에는 과거에도 지금도 ‘내가 책임지고 잘 만들어내야 하는 내 영화’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다만 영화의 완성과는 상관없이 계약기간이나 보수에 따라 이리저리 일터를 옮기면서 소위 스펙을 만드는 분위기가 이제는 있다는 뜻이다. 뛰어난 상상력과 타고난 감각에 ‘피 땀 눈물’을 더해 만들어낸 (심지어 감동까지 주는) 결과물들을 보며 늘 감탄해 온 사람으로서 슬픈 이야기였다. 동시에 어느 업계인들 다르랴 싶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낭만적인 소리를 늘어놓는 건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일이었다. 마땅히 대꾸를 못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실은 현실이다.

봉사 아닌 경제활동이라면 같은 양의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다. 그간의 노력을 수없이 부정당하며 자존심을 짓밟힌 뒤에 바늘구멍을 통과했어도 이젠 드라마에서도 그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회사생활이 내 앞이라고 펼쳐질 리 없다. 가족 같은 회사라서 일하는 만큼 돈을 주지 않고, 열정 운운하며 자괴감만 건드리는 일터가 수두룩하다.

아침마다 꾸역꾸역 눈뜨며 힘들게 먹고 사는데 노동에 열정까지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이걸 ‘요즘 애들’ 얘기라고 쉽게 치부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낭만이 생존의 위기를 압도하는 행복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 ‘드림’에서 ‘열정리스’ PD라 불리는 주인공 소민(아이유)은 “열정은 오르는데 월급은 안 올라서 열정을 최저임금에 맞췄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말한다. 현실은 이런 거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것, 요즘 열정은 그런 거다. 월급에 열정수당이 포함되던가. 덕업일치(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말. 즉,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를 이뤘다면 당신은 이 시대의 챔피언이다.

생계 유지에 몰두해 다른 것들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태도를 지금의 우리는 먹고사니즘이라고 부른다. 먹고사니즘은 무섭다. 당장 쓸 돈이 없으니 열정이니 연대니 사명감이니 하는 ‘낭만적인’ 것들은 후순위로 밀려난다. 선조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절묘한 속담을 지어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부동산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과 먹고사니즘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배타성을,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가족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꿈보다는 안정적인 월급을 선택하고, 집을 빼앗긴 분노로 살인을 저지른다. 아파트를 지킬 주민 대표를 뽑을 때 전세인지 자가인지 묻는 촌극도 펼쳐진다.

엄태화 감독은 너무나 현실 같은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만들었다. 관객들의 현실은 우울감이 훨씬 센 블랙코미디다(여기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 따위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직장인들의 마음속에 직업 정신이든 장인 정신이든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곳곳에서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존경받아 마땅하다.

고(故) 강수연 배우가 했다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외모가 조인성급이더라도 현실적으로 돈 없는데 폼 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21세기는 우리에게 낭만적인 것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