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흔히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늘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어느 고을에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사람을 존중하지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재판관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그가 사는 고을에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조르는 겁니다. 한번 거절하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더 간절히 매달립니다. 포기할 줄 모르고 찾아와서 호소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재판관에게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비유를 끝내신 예수님께서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시겠느냐.”
우리는 이 비유를 들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면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개인적인 소원을 위해 끈질기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취지로 대답하셨을까요.
과부는 재판관에게 ‘내 권리’를 찾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권리’에는 ‘정의를 실행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회와 힘 있는 사람들은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의 권리나 인권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장 공정해야 할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유하신 겁니다. 그 상대역으로 당시 가장 무시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곳도 없고 보호해줄 사람도 없는 대상인 여자, 그것도 과부를 등장시킨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과부의 기도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단순히 개인의 필요와 원한, 편안함과 문제 해결에만 매달려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불법이 있다면 그것이 고쳐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단지 우리 개인의 간증 거리만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고 정의와 공의가 세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 끝에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아마 개인적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면,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아닌 의로운 공동체를 위해서, 공의와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위해서, 억울하고 부당한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냐고 반문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선한 곳이 나올 수 없다고 평가받는 지역인 나사렛에서 태어나시고 왜 힘과 지위와 권력을 갖지 못하셨을까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 자라신 환경과 활동하신 현장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어쩌면 권리를 잃은 과부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고 사셨던 자신을 과부에 비유하신 것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이택주 주님의길교회 목사
◇주님의길교회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으로 믿음과 삶의 조화를 지향하는 작은 공동체입니다. 전주에서 카페를 빌려 주일 공동예배로 모이지만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택주 목사는 서울신대와 신대원(M.Div)에서 수학했고, 4년 전 주님의길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