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계에는 ‘5가권(五街圈)’이란 말이 있다. 서울 종로5가 기독교 관련 단체에 근무하는 관계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말은 1970~80년대 군사독재에 항거해 사회정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희생당한 ‘기독교 양심세력’을 의미했다. 1990년대 들어와 정치참여 방법과 노선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고 이전보다 결속력은 많이 떨어졌다. 5가권 밖에서는 ‘정치 목사가 많다’ ‘타락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5가권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향방과 그 내용을 만드는 구심점 역할을 해내고 있다. 다음 주부터 막이 오르는 주요 교단 정기총회에 앞서 5가권도 바빠지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성지
5가권의 정확한 지명은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번지’다. 그중 연지동 136-46(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은 한때 명동성당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불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비롯해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 기관이 많이 입주해 있어 ‘진보적’ 연합 운동의 본거지로 통했다. 재야단체가 고문근절 투쟁을 할 때, 불공정한 언론 보도나 기독교계의 시정을 요구할 때 시민들은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다.
최근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한 한국기독교회관 입주 기관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한국찬송가공회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의회 우리민족교류협회 국제사랑재단 등이다.
1992년 서울 목동 새 사옥으로 이전하기까지 CBS방송도 이곳에 있었다. 한국교회 최대 연합기구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도 9층에 입주해 있다. 한국기독교회관 오른쪽으로 연동교회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여전도회관,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등이 있다. 한국기독교회관 뒤쪽에 한국기독교연합회관까지 들어서면서 ‘연지동 136번지’ 일대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5가권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항일여성 독립운동가 이름을 붙인 ‘김마리아길’은 연동교회를 시작으로 세브란스관(옛 정신여학교 본관), 회화나무(서울시 보호수 제120호), 선교사의 집(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내), 여전도회관까지 이어진다. 김마리아길이 있는 연지동은 ‘연못골’이라 불렸다. 이 주변은 교회 설립 무렵부터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대지 3만3000㎡를 구입해 선교사 주택 등을 신축했다. 선교사들은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종로5가 일대를 선교 거점으로 삼았고 ‘선교 언덕’이라 명명했다.
연동교회는 김마리아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다. 김마리아는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나라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정신여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신의경 김영순 이혜경 장선희 김필례 오현관 등이 있다.
1904년 주일예배 출석자가 163명이고 이 중 세례교인은 35명이었다. 여기에 독립협회 회원인 박승봉 유성준 이상설을 비롯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 이준 등 양반 출신 개화파 청년도 여럿 있었다. 연동교회는 1907년 당시 주일예배에 평균 12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주일학교인 ‘소아회(小兒會)’를 시작했다.
정부와 사회의 통로
연동교회 뒤쪽 붉은 벽돌의 큰 건물인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은 미국 장로교에서 1900년쯤 이곳 대지를 매입해 한국교회에 기증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이 1984년 8월 건립해 대강당과 소강당 기도실 세미나실 등 시설을 갖췄다. 예장통합 총회 본부 건물이 바로 옆에 있다.
여전도회관은 미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사택이었던 ‘딕시 사택’을 헐고 지은 건물이다. ‘딕시(Dixie)’란 말은 미국 남부 여러 주를 통칭하는 것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딕시 사택으로 불렸다. 강당과 연수실, 회의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여전도회 역사전시관이 1층에 있으며 교회 여성 단체들이 주관하는 세미나와 포럼 등이 수시로 열린다.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도 여러 기독교 단체가 입주해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15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다. 5층에는 한국교회연합(한교연) 기독교원로연합회 기독교시민연대, 9층에는 한국교회봉사단 세계한인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학술원 미래목회포럼, 12층에 한국교회언론회가 입주해 있다. 또 14층에는 한국기독공보사 한국장로회연합회 한국장로신문 등이 있다.
종로5가의 기독교 주요 건물들은 결혼식이나 피로연 장소로도 많이 쓰인다. 대통령 입후보자나 당 대표, 관계 장관이 임명되면 한 번쯤 찾는 곳이다. 주변에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 한국원로목사총연합회와 각 교단 및 노회 사무실, 교계 신문사 등이 있다. 옛 정신여학교 건물에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등이 입주해 있다.
연합기관 통합 절실
국민일보는 한국교회 주요 목회자와 성도 100명에게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문자와 이메일 등을 통해 ‘5가권의 특징 및 역할’ ‘교회연합’ ‘한국교회 역할과 발전 방향’ 등을 물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 연합운동이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이권이나 자리싸움에 연연해 한국교회의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 등 3개 보수 연합기관이 하나 되지 못하는 현실을 그 사례로 꼽았다. 설문에서는 대다수 교회 지도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몇몇 대형 교단 지도자가 연합단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대한민국기독교원로의회 사무총장 이세홍 목사는 “힘들게 양심선언을 하고 나라와 민족의 평안을 빌며 구국기도회를 인도하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해야 한다. 5가권이 교회연합 운동의 산실로 거듭나길 기도하고 있다. 특히 다음세대가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역동적인 기독교 선교 역사와 문화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종로5가는 기독교 역사가 깃든 곳임에도 젊은 세대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기독교 문화 전문 신학자인 노영상 한국외항선교회 상임회장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처음엔 서울 정동에 자리 잡았다. 10년쯤 지난 뒤 선교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서울 중심인 종로로 진출해 서점과 예배당, 회관 등을 마련하고 이곳을 한반도 선교의 구심점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노 상임회장은 “특히 종로5가는 대표적인 기독교 문화 유적지다. 연지동 주변은 온통 기독교 건물이며 유적이다. 한국교회는 물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기독교 유적 답사 코스’로 선정,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교회언론회 사무총장 심만섭 목사는 “수많은 기독교 단체가 몰려 있는 종로5가에 사무실을 두고 23년째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다른 기독교 단체와 함께 한국교회의 올곧은 성장을 위해 더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 목사는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지 못하는 분열은 반기독교적이다. 교단들이 연합해 연합단체를 만들었는데 깨지면 어떻게 하는가. 이제 정부, 사회에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한국교회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