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내 오랜 글벗에게

입력 2023-09-01 04:05

서울 인사동을 지나가다가 신기한 물건을 보았다. 산봉우리가 다섯 개 정도 솟은 도자인데 도통 쓰임을 짐작할 수 없었다. 문진이라고 하기에는 가볍고, 장신구라고 하기에는 문양이 심심해서 내가 모르는 용도가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주인에게 물어보니 ‘필산’이라고 알려주었다. 골짜기처럼 파인 부분에 쓰던 붓을 내려놓거나 화선지를 누를 때 사용하는 서예 도구라는 것이다. 붓 필(筆)에 뫼 산(山)이라. 누가 지었는지 이름도 참 맞춤하게 지었다.

그 물건을 보자마자 한 친구가 떠올랐다. 첫 시집을 내기 전부터 십오년 넘게 정을 나눈 시인 친구다. 서툴렀지만 아름다웠던 문청 시절을 그 친구를 빼놓고 말할 수 있을까. 친구와 나는 한때 소원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만나 이전보다 더욱 돈독하게 우정을 다져나가는 중이다.

우리는 가끔 소소한 선물을 주고받을 때 손 편지를 선물에 끼워 넣곤 한다. 얼마 전 친구에게 필산을 선물할 때 썼던 메모를 읽었다. 나는 무슨 글이든 초고를 쓰고, 다시 옮겨 쓰는 버릇이 있다. 그런 습관 때문에 그에게 보낸 편지의 초고를 일기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친구야. 요 이상스럽게 생긴 물건은 필산이라 부르는데, 붓이나 연필을 받쳐두는 거래. 인사동 골동품 가게를 지나가다가 네 생각이 나서 얼른 집어 들었지. 글이 잘 안 풀리거든, 알라딘 요술 램프 문지르듯이 문질러 보세요. 문장이 반짝 떠오를지도.”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지음(知音)이라 한다. 거문고 명인 백아가 자기의 소리를 잘 이해해준 벗 종자기가 죽자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오늘도 마감하느라 필산을 요술 램프처럼 문지르는 친구를 상상해 본다. 친구야, 우리도 서로에게 지음이 되자.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주는 평생 글벗이 되자.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