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게임 장애 질병 등재, 게임업계 과도한 간섭 경계해야”

입력 2023-08-29 04:06
‘ICD-11’ 모든WHO 회원국 지지
실존 건강 문제 당연한 대응
업계 간섭으로부터 보호돼야

세계보건기구(WHO) 중독 정신건강 책임자인 블라드미르 포즈냑 박사는 최근 국민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게임 장애의 질병 등재를 비롯한 공중 보건 정책은 상업적인 이익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제공

“게임 이용 장애를 질병으로 등재하는 것은 실존하는 건강 문제에 대한 당연한 공중 보건 대응입니다. 상업적 이윤 추구가 강한 게임업계의 지나친 관심과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돼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알코올·약물&중독성 행위 분과 책임자인 블라드미르 포즈냑 박사는 지난 25일 국민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게임 장애의 질병 등재 논란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포즈냑 박사는 23~25일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8회 국제행위중독학회(ICBA)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중독성 행동 담론, 건강에 중심둬야

그는 2019년 제72차 세계보건총회(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질병분류 개정판(ICD-11)에 등재가 최종 결정된 게임 장애와 도박 장애에 대해 “이런 중독성 행동에 대한 담론의 중심을 사람들의 건강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과도한 게임 및 도박 이용과 연관된 건강피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중보건 정책과 개입을 우선시해야 하며 중독성 행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ICD-11에는 게임 장애가 처음 정식 질병 코드(6C51)로 등록됐다. 도박 장애의 경우 기존 ‘충동조절 장애’에 포함돼 있다가 게임 장애와 같은 중독성 행위 코드로 새롭게 분류됐다. 하지만 게임 장애의 질병 등재를 놓고선 게임업계가 반발하는 등 논란이 지속해 왔다.

포즈냑 박사는 “WHO는 게임·도박 장애에 ‘중독(addi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중독성 행동으로 인한 장애(disorders due to addictive behaviors)’라는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범주 아래 분류한다”면서 “알코올·약물 같은 의존성 물질과 성적(性的) 행위를 제외한, 반복적이고 보상 유발적 행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개인 기능 손상 및 고통과 관련해 구별 가능하고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증후군(syndrome)으로 정의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기간에 일부 지역에서 게임 이용 등 중독성 행동의 증가가 보고됐지만 이런 변화가 인구 전체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복잡한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이용 가능한 데이터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긴 어렵다”고 했다.

ICD-11의 질병 등재 결정 이후 각 나라별로 이를 반영하기 위한 후속 조처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찬성하는 의료계와 반대하는 게임업계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한국 정부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관련 논의와 조정을 위한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수년째 관련 연구를 진행했지만 도출된 연구 결과에 대해서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등 게임 장애 진단 기준 반영을 위한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국회에는 게임업계 입장을 반영해 ICD-11을 선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개정안까지 발의된 상태다. 이 때문에 당초 2025년 예정인 통계청의 한국표준 질병사인분류(KCD) 개정 작업 때 게임 장애의 질병 코드화가 가능할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다.

“게임의 과잉 병리화 피해야”

인터넷 게임 이용 장면. 국민일보DB

이런 한국적 상황에 대해 포즈냑 박사는 “게임 장애가 포함된 ICD-11은 2019년 세계보건총회에서 모든 WHO 회원국들에 의해 지지됐음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팩트”라고 단언했다.

“게임 장애에 따른 건강위험을 가진 사람들(소비자)을 만나면서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는 보건 현장의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논란이 없습니다. 논쟁은 디지털 기술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됩니다. 게임 산업의 상업적 이윤 추구 의도는 너무 강하며 종종 건강 문제에 지나친 관심과 관여를 시도합니다.”

포즈냑 박사는 “WHO의 궁극적 목표는 인구의 건강과 복지를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것”이라며 “동시에 수십억 명이 즐기는 오락인 게임에 대한 ‘과도한 의료화(overmedicalizing)’와 ‘과잉 병리화(overpathologizing)’ 접근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즉 모든 게임이나 게임 이용 자체를 중독성 질병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게임 행동 패턴으로 인해 심각한 기능 손상이나 장애를 보이는 이들에게 필요한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즈냑 박사는 “ICD-11에 포함된 게임 장애의 진단 요구 사항(기준)은 이를 식별하기 위한 매우 높은 문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임상 진단은 훈련된 건강 전문가만이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중보건 정책은 공공의 건강 추구라는 목표에 기초해야 하며 상업적인 이익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포즈냑 박사는 또 “ICD-11의 적용을 결정하는 것은 각국 정부의 재량이지만, 이번 국제행위중독학회에서 게임 장애와 관련해 다양한 건강 문제가 한국에 만연해 있으며, 이런 상황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건강과 복지 시스템의 전문적 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많은 발표와 연구 결과로 확인했다. 무엇이 국민 건강을 위한 일인가에 근거해 진행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이와 함께 “WHO는 다양한 문화와 국가별 서로 다른 건강 체계에서도 안정적으로 게임과 도박 장애를 식별하는데 도움 줄 수 있는 국제적인 선별 및 진단체계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 도구가 개발·보급되면 예방과 치료 서비스가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포즈냑 박사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마약 문제와 관련해선 “마약 사용자, 즉 물질사용 장애를 앓는 사람들을 벌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들은 때때로 본인이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 요소에 노출되며 또한 복잡한 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들이 감당할 수 있고 인간적이며(인권 존중) 자발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치료와 돌봄을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