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맥박·혈압·뇌파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입력 2023-08-26 04:02
게티이미지뱅크

“저의 내면에는 3개의 인격이 있어요.”

지난해 10월 경기도 광명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살해한 A씨(46)는 수사 과정에서 ‘다중인격장애’를 주장했다. 그는 ‘명’과 ‘소심이’, ‘쩐’이라는 세 인격을 나열하며 ‘명’은 기억상실 전의 인격, ‘소심이’는 기억이 상실된 8년 동안의 인격, ‘쩐’은 최근 나타난 인격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지난 8년간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였고, 그 사이에 아내가 자신을 노예처럼 부렸다는 변명도 달았다. 이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대검찰청 심리분석실은 A씨를 상대로 심리생리검사를 진행했다. 심리생리검사는 거짓말을 했을 때의 땀·맥박·혈압의 변화 등을 측정해 거짓 여부를 가려내는 검사기법이다. 분석관이 “인격들끼리 대화도 하느냐”는 질문에 A씨는 “당연하다. 걔네들 이야기하는 것도 자주 듣는다”고 답했다.

“자, 그럼 명과 쩐의 목소리는 어떻게 달라요?” 분석관의 질문에 A씨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완벽히 똑같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며 답을 얼버무렸다.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되고 “다른 인격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들은 게 분명하냐”는 분석관 질문에 A씨는 “네”라고 답했지만, 그의 몸에 붙은 측정 센서들은 정반대의 대답을 내놨다. 호흡 패턴이 흔들리고 혈압이 오르는 등 거짓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A씨의 다중인격 주장이 거짓말로 판명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방철 서울중앙지검 심리분석팀장이 최근 서울중앙지검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방 팀장은 대검 심리분석실장을 지내며 피의자의 거짓말이나 심리상태, 범행의 고의성 등을 밝히는 통합심리분석을 진행했다. 권현구 기자

당시 대검 심리분석실장을 지낸 방철 서울중앙지검 심리분석팀장은 22일 “심리분석을 할 때 피의자의 자기합리화가 가능한 내심의 의도를 묻는 말은 하지 않는다”며 “이 사건에서도 ‘인격들 사이 대화를 들었느냐’는 실제 경험 여부를 물었을 때 굉장히 드라마틱할 정도의 거짓 반응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대검 통합심리분석은 이처럼 피의자의 거짓말이나 심리상태, 범행의 고의성 등을 밝히는데 활용되고 있다. 심리분석을 통해 사이코패스 여부와 재범 위험성이 확인되면 수사·공판 과정에 중요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신림동 흉기난동범 조선이나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의 내면에서 분노를 발견한 것 역시 통합심리분석을 통해서였다.

통합심리분석에 활용되는 기법으로는 심리생리검사 외에도 뇌파분석, 행동분석, 임상심리평가가 있다. 피의자 지능이 너무 낮거나 심한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 다른 검사 진행이 어렵기 때문에 이를 가려내기 위한 임상심리평가부터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임상심리평가에는 지능검사, 사이코패스 테스트 등 각종 심리평가가 포함된다.

뇌파분석은 범인만이 알 수 있는 범죄정보를 검사 대상 피의자가 인지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기법이다. 예컨대 칼이 사용된 살인사건에서 피의자에게 칼, 도끼, 망치 등 다양한 흉기사진을 보여주고 뇌파의 변화를 측정하는 식이다. 방 팀장은 “범인의 경우 칼 사진에서 극적인 뇌파반응이 나타나지만, 관련이 없는 사람은 본인에게 의미 있는 자극이 아니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행동분석은 거짓말로 인해 나타나는 행동 반응과 부적절한 정서표현을 포착해 거짓 여부를 판단한다. “딸을 살해한 엄마에게 ‘아이가 왜 죽었는지 짐작 가는 게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말은 ‘전혀 없다’고 하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방 팀장은 기억했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경찰 프로파일링과 유사해 보이지만 기법과 목적에 차이점이 있다. 프로파일링이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유류물과 증거품 등을 통해 범인의 상을 그리고 용의자 범위를 좁혀나가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통합심리분석은 피의자의 진술 진위 여부나 성격적인 특성, 사이코패스 여부, 재범 위험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역할을 한다.


통합심리분석이 수사 과정에만 도움을 주는 건 아니다. 2015년 내연남의 아내를 청산가리로 살해한 내연녀 사건의 경우 범인으로 지목된 내연녀는 애초 청산가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심리생리검사에서 거짓 반응이, 임상심리평가에서 연극성 성격장애를 갖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방 팀장은 “연극성 성격장애는 모든 관심의 중심이 내가 되지 않으면 굉장히 불편해하는 특징이 있다”며 “연인관계에서 상대를 감정적으로 조종하기도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자해를 하거나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통합심리분석 결과 보고서가 법원에 제출됐고, 분석관들의 법정 증언을 통해 보고서가 증거로 채택됐다. 내연녀는 살인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물증 없이 진술만 있는 사건에서는 특히 심리분석의 역할이 크다. 방 팀장은 10년 전 한 시골마을에 거짓말탐지 검사를 위한 이동식 장비를 들고 갔던 일을 예로 들었다. 당시 검찰은 마을 남성이 지적장애를 가진 모녀를 성폭행한 사건에서 뚜렷한 물증이 없어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다. 피의자는 성관계 자체를 부인했고, 지적장애가 있는 피해자들의 진술에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 분명한 거짓 반응이 나왔고 이를 토대로 기소가 이뤄져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다만 대법원은 거짓말탐지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1979년 ‘백화양조 사건’에서 거짓말탐지기의 증거능력을 부인한 이래 44년간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방 팀장은 “현행법상 심리생리검사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증거능력은 증거로서의 자격을 말하는데, 이는 입법자에 의해서 형식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전국 검찰청에서 들어오는 통합심리분석 의뢰가 끊이질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묻지마 범죄, 살인으로 이어진 스토킹 범죄 등 각종 흉악범죄의 피의자 심리 및 범행동기를 분석하고, “우발적 범행”이라는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 사건처럼 분석 필요성이 높은 경우는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기 전부터 문의가 올 정도다.

하지만 지원이 가능한 사건에는 한계가 있다. 대검 심리분석관은 10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속사건 우선 처리’ 등 중대 사건 순으로 순번을 정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방 팀장은 “강력범죄를 척결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건에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분석관 증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