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강국 한국을 찾아온 이주민은 “한국인은 놀랄 만큼 친절하지만, 외국어 서비스가 아쉽다”고 말했지만, 뿌리 산업에 일하러 온 이주민은 여전히 ‘이 새끼’ ‘빨리빨리’ 같은 한국말을 가장 먼저 배우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보는 한국은 이들이 한국에 온 목적과 배경에 따라 크게 달랐다. 그들의 비자가 한국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는 ‘프리즘(분광기)’인 격이었다. 이들의 말 속에서는 인구소멸의 불똥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주민을 포용해야 한다”고 외치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가 드러났다.
이주민들은 한국과 국제사회의 교류가 점점 잦아진 결과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한국은 세계 청년이 선망하는 콘텐츠를 가진 나라였고, 개발도상국 시민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경제 강국이기도 했다. 여러 비자로 한국에 머무는 이들에게 “어떡하면 한국에 외국인들이 더욱 많이 찾아와 머물겠느냐”고 물어봤다. 이주민들은 한국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행정·문화 지원을 강화하고, 더 쉽게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답했다.
D-4 “친절한 한국, 언어는 장벽”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인근에서 만난 러시아인 만지레바 마리(19)는 자신을 K팝 가수 지망생이라 소개했다. 그는 8살이었던 2012년 걸그룹 씨스타의 무대를 본 뒤 줄곧 한국에 오는 꿈을 꿨고, 올해 초 19살이 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마리는 1주일에 여섯 번씩 서울 강남구에 있는 연예인 지망생 전문 아카데미를 오가며 데뷔를 꿈꾸고 있다. 유명 K팝 그룹의 외국인 멤버로 무대에 서기 위해 댄스 학원에 나가고 있다.
그는 “한국어가 서툴고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게 힘들다”면서도 한국 생활을 ‘기대 이상’이라고 했다. “한국이 K팝과 K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활에 만족한다”는 것이 그의 총평이다. 서울의 모든 길거리가 드라마에서처럼 반짝반짝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인에게 과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한국인의 모습은 감동적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학원에서도 한국인 동료들이 답답할 법한데도 인내심을 갖고 한국어 공부를 도와준다”고 했다.
마리는 외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장벽을 느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마리가 한국에 들어올 때 발급받은 비자는 D-4(일반연수비자)다. 이 비자로는 가족들을 동반해서 한국에 입국할 수 없다. 정식으로 취직하거나 기획사와 계약을 맺으면 좀 더 기간이 긴 비자가 나오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처지다.
마리는 외국인들이 마주하는 작은 불편이 해소되면 좋겠다고 했다. 마리는 “편의점에 가서 간단한 물건을 사려 할 때, 한정식집에 가서 한 끼 식사를 하려 할 때도 한국어를 잘 모르면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대중교통 시설 등 다양한 공공장소에 영어가 병기된 지 오래지만, 마리는 이 역시 더욱 확대됐으면 한다고 했다. 실생활에서 외국인이 겪는 어려움은 원주민의 생각보다 더욱 큰 셈이었다.
F-6 “한국, 외국인 수용성 부족”
한국 생활 6년 차인 네덜란드인 바트 반 게누그텐(31)은 한국 곳곳을 여행하며 콘텐츠를 만드는 여행 유튜버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2019년 6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후 결혼 비자(F-6)를 발급받아 한국에 정착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한국을 ‘세계 속의 도시’라고 했다. 빠른 변화가 한국의 특징이라 했다.
게누그텐은 “10년 전엔 아무도 한국을 몰랐지만, 요즘은 한국을 다 알지 않느냐”며 “내가 이곳에서 그 변화의 일부가 되는 게 재밌다”고 말했다. 게누그텐은 2014년 성균관대 어학당을 3개월간 다니며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거리에는 10년 전보다 많은 외국인이 보이고, 새로운 외국인 커뮤니티도 생겨났다”며 “더 많은 한국 기업이 외국인들과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이런 게누그텐은 한국의 외국인 수용도가 높진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관공서나 은행, 통신사 등 많은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곳들은 외국인의 입장에서 접근성이 낮았다는 아쉬움이다. 특히 웹사이트를 영어로 이용하기 어려웠다고 그는 말했다. 온라인으로 서류를 작성하려 할 때, 허용된 공란은 그의 이름보다 짧았다. 예금과 보험에 가입할 때 단순히 이름을 기입하기 위해 직접 기관을 방문해야 했던 경험이 여러 차례다. 그는 “온라인으로는 안 되니 무조건 사무실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게누그텐은 외국인을 환영하고 개방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보다 실질적으로는 일자리 접근성이 높아졌으면 한다고 했다. 게누그텐은 “외국인들이 (사회에) 통합되거나 이민을 오거나 일자리를 얻는 것을 쉽게 만들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9, “치토치토, 숨 가쁜 한국”
한국을 찾은 네팔인 노동자 중 상당수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네팔 노동자교회’에서 신앙의 첫발을 뗀다. 처음에는 다들 다른 용건 때문에 찾아온다. 이 교회의 이종만 목사는 “밀린 월급을 받아 달라고 교회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지난달 26일 이 교회 예배당에서 만난 샤라다 까르끼(25)도 비슷한 경우였다.
까르끼는 지난해 비전문취업비자(E-9)로 한국에 와 호박과 고추, 토마토 등을 재배하는 강원도 홍천의 한 농장에 취업했다. 컨테이너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임금(월 210만원)이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까르끼는 “친척의 소개로 한국을 알게 됐는데 일은 힘들어도 벌이가 괜찮아 한국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네팔의 서점에서 일할 땐 벌이가 한국에서의 반의반에도 못 미쳤다.
까르끼는 한국에서 비자 체류 기간(약 10년)을 꽉 채워 일한 후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집도 짓고 병원비도 낼 만큼 돈을 모은 후 여기에서 배운 기술로 고향에 농장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카트만두 서쪽에 있는 그녀의 고향 ‘팔파’는 전통의상 ‘디카토피’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풍족한 지역은 아니다. 까르끼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농장에서 일하는 반년 동안 제때 받지 못한 임금이 350만원에 달했다.
이 목사가 체불임금을 받아줬지만, 까르끼는 일자리를 잃고 그나마 머무르던 ‘컨테이너 기숙사’에서도 나와야 했다. 임금 체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리자의 폭언도 있었다. 한국말이 서툰 까르끼는 ‘새끼’라는 한국말만은 명확하게 발음했다. 그 외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치토치토(빨리빨리)”라고 말했다. 단기간에 과중한 업무가 몰리곤 하는 농장업무의 특성이 단어에도 녹아 있었다.
네팔 노동자들에게 한국 이주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까르끼를 비롯한 많은 네팔인이 이런 이유 때문에 일터를 떠나 교회나 교회가 제공한 숙소에서 일정 기간 머무르곤 한다. 최근에도 10명 안팎의 노동자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비자 발급과 유지의 어려움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까르끼는 “앞으로는 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 전문 기술이 있는 쪽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택현 김지훈 정진영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