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도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연구·개발(R&D) 예산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내년도 출연연의 기본 사업비가 최대 30% 감소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탈피 등 출연연의 중장기 과제 해결이 저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1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한국 혁신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출연연의 총수입 5조5080억원 중 3조670억원(56%)은 PBS를 통한 수입이었다. 출연연 재정의 83%(4조5830억원)에 달하는 정부 기여분 중 절반 이상은 직접적인 출연금이 아닌 PBS를 통한 지원이었다는 뜻이다. PBS는 출연연 간 경쟁을 통해 국가·공공기관의 연구과제를 수주해 연구자 인건비를 충당하도록 하는 한국의 연구기관 운영제도다. 1996년 경쟁 요소의 도입으로 출연연 운영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문제는 출연금보다 비중이 커진 PBS가 연구자들을 단기 과제 위주의 수주 경쟁에 내몰아 장기적인 기초 연구를 가로막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4월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이 출연연 종사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출연연 소속 연구자 552명 중 75%가 ‘PBS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OECD는 혁신 보고서에서 “PBS는 (출연연이) 정부에서 정한 우선순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 수 있다”며 이를 한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목했다. OECD는 “PBS에 대한 재정적 의존도가 높아 장기적 연구 지향이라는 측면에서 우려스럽다”며 “출연연의 자체 재원을 장기적으로 늘려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지시를 계기로 내년도 R&D 예산 전면 재검토를 진행 중이다. 지난 정부에서 관련 지출이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2017년 19조5000억원이던 국가 R&D 예산은 올해 30조7000억원으로 늘어 처음으로 30조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R&D 지출 비중도 한국은 0.5%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다만 출연연의 주요 사업비를 최대 30%까지 일괄적으로 줄인다는 소식에 과학기술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급작스러운 구조 조정이 출연연의 PBS 의존도를 되레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광오 공공연구노조 조직실장은 “벌어와야 하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연구 관련 예산을 일괄적으로 줄이게 되면 단기 과제를 둘러싼 경쟁만 더욱 치열해지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정부에서 정립한 출연연의 역할과 책임(R&R)도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R&R은 출연연마다 명확한 역할과 중장기 비전을 세워 상향식으로 상응하는 연구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삭감된 사업비로는 R&R에 맞는 연구과제 수행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세종=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