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이 법원에서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앞서 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을 대신해 배상금을 공탁하는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해 법원 공탁관은 공탁 불수리 결정을 했다. 정부가 이에 불복해 이의신청했지만, 법관이 사건을 심리한 후 재차 기각한 것이다. 관련 사건 중 재판부 기각 결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주지법 민사12단독 강동극 판사는 공탁관 불수리 처분에 대한 재단 측 이의신청을 기각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사건 신청인은 재단이고, 피신청인은 국가(법원 공탁관)다. 채무자는 일본 피고 기업, 채권자는 고(故) 박해옥 할머니 자녀 2명이다.
강 판사는 “이 사건은 민법 제469조 1항에 따라 제3자 변제가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민법 469조 1항은 ‘채무 성질 또는 당사자 의사표시로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 제3자 변제를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강 판사는 이 사건 채권이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위자료 채권인 점, 채무자를 제재하고 채권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큰 사안인 점을 고려할 때 채권자 측 의사가 우선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 판사는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배상책임을 직접 추궁할 수 있는 법률상 지위나 권한이 제3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며 “채권자 반대에도 이해관계 없는 제3자 변제를 허용하는 것은 손해배상제도 취지와 기능을 몰각시킬 염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일본 기업을 상대로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 15명 중 11명은 제3자 변제를 받아들였다. 생존 피해자 2명(양금덕·이춘식)과 고인이 된 피해자(박해옥·정창희) 유족 측이 정부 해법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이춘식(103) 할아버지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해마루는 이달 광주지법에 “이 할아버지는 2005년부터 일본 기업 사과와 책임을 묻는 활동을 해왔다. 이런 노력이 제3자 공탁이라는 부당한 조치로 헛되이 소멸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견서를 냈다.
재단 측은 전주지법 외에도 광주지법 등에서 이의신청 사건을 진행 중이다. 법조계에서는 다른 법원 하급심에서도 유사한 법리로 기각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재단 측이 항고 등을 진행하면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공탁 불수리 결정이 최종 확정될 경우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은 진퇴양난 지경이 된다. 피해자 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에 대한 자산 매각 명령 사건에서 최종 승소할 경우 강제집행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공탁이 무산되면 일본 기업 측이 ‘채권 소멸’을 주장하기도 어려워진다.
박해옥 할머니 측을 대리한 김정희 변호사는 “이번 기각 결정으로 대법원에 묶여 있는 현금화 명령 사건을 더 미룰 명분이 없어졌다”며 “관련 절차가 신속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민 양한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