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을 음역한 우리암(禹利岩·Franklin E C Williams·1883~1962) 선교사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이름을 ‘광복’(禹光福·George Z Williams·1907~1994)이라고 작명했다. 한국의 독립과 교육을 위해 대를 이어 헌신하고 복음을 전파한 미국인 선교사 우리암 우광복 부자(父子)의 후손들이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후손들은 “미국에서 윌리엄스란 이름은 흔한데 한국 덕분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면서 “한국이 광복을 이룬 뒤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 박사) 산하 우리암·우광복선교사기념사업회는 15일 우리암 선교사에 대한 국가보훈부의 건국포장 수훈을 계기로 10명의 후손을 한국에 초청했다. 지난 11일부터 한국에 머문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 가운데 3대손 델리(Delee)씨와 알프레드(Alfred)씨, 4대손 그래프톤(Grafton)씨를 국민일보가 단독으로 만났다. 광복절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우리암 우광복 부자의 후손들 인터뷰는 14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진행됐다.
우리암 선교사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사역하며 1909년 영명학교를 세웠다. 1906년 공주로 온 이후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34년간 충남 지역에서 교육과 선교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병옥 박사와 유관순 열사는 물론 그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우석 지사 등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첫아들 조지의 이름을 우광복으로 지었다. 우광복 선생은 14살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 돌아와 군의관으로 자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했다. 서만철 회장은 “미 군정에서 일할 50명의 한국인을 선발할 때 우광복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선발된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 회장은 지난해 ‘우리암과 우광복 이야기’(밀알북스·표지)를 공동 저술하기도 했다.
3대손 델리씨는 할아버지 우광복 선생에 대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다”고 기억했다. 그는 “우광복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기에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이 가난했는데, 할아버지는 당시 한국 상황과 관계없이 한국인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열정적인지를 알려주셨다”고 소개했다.
델리씨의 동생 알프레드씨는 “윌리엄스는 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인데 지난해에 이어 한국에 오게 되면서 우리 가족들이 윌리엄스라는 이름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우리 조상의 업적을 발견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나서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4대손 그래프톤씨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선조들이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들인지 몰랐다”며 “한국이 광복을 이룬 뒤 눈부시게 발전하고 교회를 많이 세워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알프레드씨는 “공주에 우리암 우광복 기념 박물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예산이 많이 들 텐데 우리 가족도 그 일에 어떤 형태로든 이바지하며 선조들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광복절 기념식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에게 직접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윤 대통령은 “미국인 선교사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은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면서 “1943년 인도 전선에서 광복군의 한·영 연합 작전을 도왔고 광복 직후엔 미 군정청의 농업 정책 고문으로 발탁돼 활동했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