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방선기 (12) 하용조 목사 도움으로 귀국 후 어려움 없이 서울 정착

입력 2023-08-16 03:02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86년 미국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유학 중 사역했던 뉴욕중부교회의 유년부 학생들과 함께한 모습.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뉴욕 한인교회 전도사로 섬겼다. 교육학을 전공하지만 교회 사역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뉴욕에서는 교회 2곳에서 사역했다. 한 교회에선 유년부를, 다른 교회에선 중고등부를 맡았다.

유년부에선 주로 교사 훈련에 힘을 쏟았다. 어린이 예배에 익숙지 못해 설교 준비를 할 땐 교사의 도움도 받았다. 중고등부 지도는 유년부보다 더 힘들었다. 청소년 지도법을 잘 모르는 것도 문제인 데다 영어도 서툴러 교포 자녀와의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명색이 교육학 전공자였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 교회에서 내가 성도를 지도했다기보단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 나를 훈련했다고 생각한다.

한인교회 부교역자를 하며 즐겁고 행복한 기억도 많았으나 갈등을 겪은 일도 있다. 뉴욕의 한 교회에서 사역 도중 불합리한 점을 목도한 나는 주변에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를 접한 담임목사가 나를 불러 책망했고 나는 바로 사의를 표했다.

사표를 낸 뒤 이 교회를 당장 떠나는 게 맞는지를 놓고 기도했다. 기도 중 얻은 결론은 “목사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떠나자”는 것이었다. 담임목사에게 용서를 구한 나는 한 달 뒤쯤 사임 뜻을 전했다. 그 결과 성도에게 인사도 전하고 담임목사에게 식사도 초대받으며 아름답게 사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뉴욕 유학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더 있다. 고(故) 하용조 목사와의 인연이다. 유학 시절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나는 종종 하 목사가 세운 두란노서원 미국 동부지사를 찾아 일을 도왔다. 주로 책을 주문받고 배송해주는 일이었다. 두란노서원이 발간하는 잡지 ‘빛과 소금’에도 가끔 기고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을 앞둘 때였다. 하 목사가 한국에 오면 두란노서원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목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모두 자신 없어 고민하던 내게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하 목사는 귀국 한 달 전부터 내가 혼자 쓸 사무실과 책상을 마련했다고 한다. 당시 두란노서원 직원들은 ‘방선기 목사가 누구이기에 하 목사님이 저렇게 기다리느냐’며 나를 무척 궁금해 했다고 한다.

그분의 환대는 사무실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세 자금을 대주고 업무를 위한 차량도 지원했다. 기업 임원 같은 대우였다. 하 목사의 애정 어린 지원에 힘입어 우리 가족은 긴 타향살이를 마치고 서울 생활에 어려움 없이 정착할 수 있었다.

두란노서원은 내가 입사한 80년대 후반 한국교회 목회 트렌드를 이끌고 있었다. 두란노서원이 주최한 세미나 내용은 오래지 않아 한국교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큐티나 강해설교,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등 각종 세미나는 한국교회 성도와 목회자의 영적 성장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나는 이들 세미나를 주관하는 담당자로서 직접 강의도 하고 출판물 원고도 썼다. 여는 세미나마다 반향을 일으키면서 문서사역을 향한 내 열정도 커졌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