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뉴욕 한인교회 전도사로 섬겼다. 교육학을 전공하지만 교회 사역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뉴욕에서는 교회 2곳에서 사역했다. 한 교회에선 유년부를, 다른 교회에선 중고등부를 맡았다.
유년부에선 주로 교사 훈련에 힘을 쏟았다. 어린이 예배에 익숙지 못해 설교 준비를 할 땐 교사의 도움도 받았다. 중고등부 지도는 유년부보다 더 힘들었다. 청소년 지도법을 잘 모르는 것도 문제인 데다 영어도 서툴러 교포 자녀와의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명색이 교육학 전공자였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 교회에서 내가 성도를 지도했다기보단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 나를 훈련했다고 생각한다.
한인교회 부교역자를 하며 즐겁고 행복한 기억도 많았으나 갈등을 겪은 일도 있다. 뉴욕의 한 교회에서 사역 도중 불합리한 점을 목도한 나는 주변에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를 접한 담임목사가 나를 불러 책망했고 나는 바로 사의를 표했다.
사표를 낸 뒤 이 교회를 당장 떠나는 게 맞는지를 놓고 기도했다. 기도 중 얻은 결론은 “목사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떠나자”는 것이었다. 담임목사에게 용서를 구한 나는 한 달 뒤쯤 사임 뜻을 전했다. 그 결과 성도에게 인사도 전하고 담임목사에게 식사도 초대받으며 아름답게 사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뉴욕 유학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더 있다. 고(故) 하용조 목사와의 인연이다. 유학 시절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나는 종종 하 목사가 세운 두란노서원 미국 동부지사를 찾아 일을 도왔다. 주로 책을 주문받고 배송해주는 일이었다. 두란노서원이 발간하는 잡지 ‘빛과 소금’에도 가끔 기고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을 앞둘 때였다. 하 목사가 한국에 오면 두란노서원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목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모두 자신 없어 고민하던 내게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하 목사는 귀국 한 달 전부터 내가 혼자 쓸 사무실과 책상을 마련했다고 한다. 당시 두란노서원 직원들은 ‘방선기 목사가 누구이기에 하 목사님이 저렇게 기다리느냐’며 나를 무척 궁금해 했다고 한다.
그분의 환대는 사무실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세 자금을 대주고 업무를 위한 차량도 지원했다. 기업 임원 같은 대우였다. 하 목사의 애정 어린 지원에 힘입어 우리 가족은 긴 타향살이를 마치고 서울 생활에 어려움 없이 정착할 수 있었다.
두란노서원은 내가 입사한 80년대 후반 한국교회 목회 트렌드를 이끌고 있었다. 두란노서원이 주최한 세미나 내용은 오래지 않아 한국교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큐티나 강해설교,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등 각종 세미나는 한국교회 성도와 목회자의 영적 성장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나는 이들 세미나를 주관하는 담당자로서 직접 강의도 하고 출판물 원고도 썼다. 여는 세미나마다 반향을 일으키면서 문서사역을 향한 내 열정도 커졌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