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교회는 ‘연애당’이라고 불리곤 했다. 남녀가 대체로 분리돼 있던 중·고등학교와 달리 교회에선 남녀 청소년이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교회 중·고등부 활동에 적극적이던 나였지만 이성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사귀는 일은 멀리했다. 가뜩이나 ‘연애당’ 소리를 듣는데 중·고등부를 이끄는 나까지 연애 대열에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감 가는 여학생이 있어도 속으로만 좋아하고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연애를 멀리하는 기조는 대학부에서도 이어졌다. 우리 교회는 대학 재학 중 연애하지 않는 걸 권장했다. 연애보다 신앙훈련에 힘쓰자는 취지였다. 지금 시각에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여기에 공감해 ‘교회 연애’를 멀리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누군가를 사귄 것도 아니다. 미팅도 나가봤지만 처음 만나 대화하는 자리가 어색해 한 번 나가고 그만뒀다.
이랬던 내가 생각을 바꾼 건 아내를 만나고부터다. 아내는 대학 4학년 때 같은 교회를 다닌 박성수 현 이랜드그룹 회장과 연세대를 찾았다가 처음 만났다. 한 무리의 여학생 속에 있었는데 아내만 홀로 빛났다. 알고 보니 교회 대학부 2년 후배였다. 이런 강렬한 첫 만남 이후 나는 아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곧 교제하는 사이가 됐다.
첫눈에 반한 여성과 교제를 하다 보니 결혼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돼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2학년생에게 결혼은 너무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부담을 느낀 아내는 얼마 뒤 이별을 고했다. 실연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하나님 뜻을 알 순 없지만 기도로 아픔을 이겨내고자 노력했다.
얼마 뒤 국방과학연구원에 취업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실연의 아픔도 점차 아물어 갔다.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도 몇 번 받았지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찾다 보니 인연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아내와 재회했다. 헤어진 지 5년 만이었다. 다행히 미혼이어서 다시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우리는 곧 약혼하고 1979년 3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나는 27세, 아내는 25세였다. 이후 우리는 45년째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헤어진 지 5년 뒤에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으며 배운 게 있다. 결혼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땐 상대가 누구인지만 고려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찾으며 결혼 과정을 준비해야 하고 시기도 그분께 맡겨야 한다. 내 경우는 하나님께서 5년의 시간을 두고 결혼 훈련을 시킨 게 아닐까 싶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결혼 생활은 한쪽만 잘해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이 겸손한 태도로 마음을 모아야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겸손히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는 결혼 후에도 중요하다. 자녀의 삶에 부부관계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부모의 부부관계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