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교회 사역만 열정적으로 했기에 학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직장 선택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군대 문제가 중요했기에 군 복무를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선택지에 과학원이 있었지만 내 실력으론 어려워 대신 국방과학장교를 지원했다.
막상 지원 상황을 보니 과 동기 중에 꽤 많은 인원이 국방과학장교에 지원했다. 이를 확인한 순간 낙담이 됐다. 내 성적으로는 도저히 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발표 날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과학장교로 동기 두 사람이 합격했고 나는 불합격했다.
그런데 합격자 이름 옆에 내 이름을 포함해 몇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사람들은 사무실에 들르라는 메시지도 있었다. 찾아가니 군대 면제 조건으로 일하는 보충역을 선발하는데 그 후보자로 우리가 선정됐다는 게 아닌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5년간 근무하면 군대 면제란 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시험엔 불합격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국방과학연구소에 합격한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대학생 때는 공부를 배설물처럼 여겼지만 직장에서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엔지니어로서 능력은 별로 없었지만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승진도 잘하고 학창 시절 한 번도 받지 못한 표창도 받았다. 국방부에서 상도 받았다.
일만 한 게 아니라 대학 시절 훈련받은 대로 전도와 양육도 열심히 했다. 실험실 동료를 전도하기도 했고 같이 사는 후배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당시는 연구소가 대덕단지에 있어 기숙사 생활을 해 가능했던 일이다. 믿음이 생긴 이들과는 성경공부도 했다.
연구소 월급이 충분한 편이라 오랜만에 경제적 안정감을 느꼈다. 연구소 사람도 학교 선후배 같아서 비교적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을 했다. 6년간의 연구소 경험은 나중에 일터사역을 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됐다.
이때의 특별한 경험은 6개월간 프랑스 연수를 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군인은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과학장교에 떨어진 덕분에 민간인 신분으로 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1975~1976년 당시엔 출국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다.
연수를 마친 후엔 언어는 물론 프랑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러다 지난 2009년 건강이 악화해 안식년을 떠날 때 희미해진 프랑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안식년을 기회 삼아 프랑스로 가 1년간 언어연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에 대한 비전도 갖게 됐다. 수십 년 후 선교 비전도 심어준 연구소 생활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 아닌가 싶다.
이 기간엔 슬픈 사건도 있었다. 프랑스 체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외를 쉽게 나가던 때가 아니라 회사는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연수를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를 마중 나온 교회 성도들에게 아버지가 2개월 전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집에서 어머니를 마주하며 지나간 슬픔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부활해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겨우 슬픔을 극복했다. 이 경험은 비슷한 아픔을 겪는 분을 위로할 때 도움이 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