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에 9:26)
(Therefore these days were called Purim, from the word pur.) Because of everything written in this letter and because of what they had seen and what had happened to them.(Esther 9:26)
아말렉 사람 하만은 ‘부르’를 사용했습니다. 유다인들이 죽임당할 날짜가 이 ‘부르’를 통해 결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부르’는 슬픔과 애통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유다인은 자신들이 해방된 날을 ‘부림’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통의 단어를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은 매년 부르를 기억했습니다. 짙은 어둠과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깊이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540장의 가사처럼 우리가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인철 목사(그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