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방선기 (2) 구한말 증조부 때부터 믿음 다진 ‘찐 기독인’ 집안

입력 2023-08-02 03:01
방선기(뒷줄 오른쪽 첫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어린 시절 방효천(앞줄 오른쪽 두 번째) 할아버지와 부모님, 사촌누이 등과 찍은 가족사진 모습.

우리 집안 신앙 내력을 소개하려면 19세기 구한말 시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신앙의 시조가 된 증조할아버지 방만준 영수(領袖)는 1898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세례를 받은 초기 기독교인인 셈이다.

신앙 때문에 집성촌에서 온갖 박해를 당한 증조부는 고향을 떠나 불모지를 개간하며 5남 1녀를 키웠다. 얼마나 박해가 심했던지 이웃들이 증조할아버지 집에 불을 놓기도 했다. 여러 차례 방화 시도에도 번번이 집이 전소하지 않자 박해 세력도 점차 힘을 잃었다.

근면 성실한 성격대로 신앙생활도 철저히 한 증조할아버지 덕에 후손도 대대로 신앙인으로 자랐다. 이중 장남 방효원과 삼남 방효정, 사위 홍승한은 목사다. 방효원 홍승한 목사는 한국교회가 최초로 파송한 중국 선교사이기도 하다. 방효원 목사의 맏아들은 21년간 중국선교에 나선 한국 선교사(史)의 산증인이자 한국교회 거목인 방지일 목사다. 방지일 목사는 우리 아버지 방문일 집사의 사촌 형이어서 나는 그분을 큰아버지로 불렀다. 우리 할아버지께도 정기적으로 인사 편지를 보내곤 했다. 어린 시절에 그분이 보낸 엽서를 보며 큰아버지를 존경하게 됐다.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조카인 나와 아내, 자녀와 손주까지 살뜰히 돌본 자상한 분이다. 우리 친척 중에 그분의 사랑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뿌리 깊은 신앙 가문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부모님은 주일엔 일을 쉬고 평소 가정예배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문화에 익숙했다. 어린 시절의 내 생활을 엄밀히 말하면 교회에 다녔다기보다 교회에서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당시 출석하던 성도교회가 바로 집 앞에 있어서 매일 교회 마당을 찾았다. 성경 읽기나 성경 암송 등 주일학교 숙제를 학교공부 하듯 성실하게 했기에 착실한 어린이로 인정받았다. 돌이켜 보면 이런 삶이 훗날 신앙의 기초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부모님은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한때 부모님과 4남매, 할아버지와 사촌 누나까지 총 9명이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지낸 적도 있다. 당시 우리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한 서민 아파트에 살았다. 일본식 아파트로 수십 개의 방이 밀집된 구조였다. 부모님은 부지런한 분들이라 식솔을 굶기진 않았지만 어려운 형편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나중에 조금 나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이후로도 아버지가 친척에게 자금을 빌려 시작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계는 점차 기울었다.

집도 비좁고 이웃의 생활소음으로 집에서 공부하기 쉽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재학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다만 부모님이 장사하느라 학교에 올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주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보며 약간의 열등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