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을 당연한 지혜(Ars Moriendi)로 삼고 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시 49:12, 새번역) 또 다른 시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6) 태어나 죽을 때까지 부지불식간에 흐르는 세월을 성경은 칠십, 길어야 팔십으로 한정했습니다.
필연적으로 겪는 죽음이지만 문화마다 달라서 나름의 생사관과 의식을 고안해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가 지배하는 저승을 믿어 죽은 사람을 방부 처리하여 미라로 만들었고, 환생을 믿은 티베트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칼로 해체한 시신을 들과 산에 두어 독수리 먹이로 삼게 하는 조장(鳥葬)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선 무척 혐오한 화장을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아킬레우스의 벗 파트로클로스나 카이사르의 경우처럼 외려 선호했습니다. 그 외에도 바다나 강과 인접한 곳에서는 물에 흘려보내는 수장(水葬), 농사하는 내륙에서는 시신을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가 매장하는 풍장(風葬)과 탈육하고 뼈만 장사하는 초분(草墳)을 대대로 고수했습니다.
유대인은 근동 부족과 달리 죽음을 특별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그저 노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두 팔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문장같이 되고, 두 다리는 허리가 굽은 군인같이 되고, 이는 맷돌 가는 여인처럼 빠지고, 눈은…흐려지리라…귀는 먹어 방아 소리 멀어져 가고…머리는 파뿌리가 되고…영원한 집에 돌아가면 사람들이…애곡하리라.”(전 12:3~5, 공동번역) 해골이 널린 로마의 카타콤베에서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죽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이었습니다. 사람(아담, adam)은 흙에서 왔으니 흙(아다마, adamah)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 번 쏟은 물을 다시 담아낼 수 없듯 죽음을 돌이킬 길은 따로 없습니다. 욥의 고백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의미가 제대로 살아납니다.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님께서는 다 헤아리고…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욥 14:5, 새번역)
성경 시대에는 상대가 누구든 일단 죽으면 잊힌 존재였습니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찬양할 수 없고 기적과 정의를 알지 못합니다.(전 9:4~5) 그러니 비록 개라도 살아 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다. 죽은 이는 산 사람의 세계와 무관한 잊음의 땅에 속한다는 게 이스라엘의 믿음이었습니다.(시 88:10~12)
모세처럼 대단한 영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 34:5~6) 위대한 지도자의 무덤이 어디인지 굳이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윗 역시 같았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유언은 비교적 소상히 전하면서도 무덤의 위치는 대충 얼버무립니다.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왕상 2:10) 영웅호걸도 사멸할 수밖에 없는 하루살이, 그림자의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