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당국이 은행과 보험, 증권 등 업권을 가리지 않고 행정지도를 강화하면서 ‘그림자 규제(보이지 않는 규제)’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금리 인상에 따른 리스크 관리, 회계제도 변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법령 등 근거가 부족한 채로 금융사 경영에 과도하게 간섭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2015년 이후 수없이 그림자 규제를 없애겠다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행정지도, 감독행정작용을 늘리며 이 약속이 공수표가 됐다는 지적이다.
26일 국민일보가 최근 6년간 금융감독원 행정지도 내역을 분석해 본 결과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금감원이 내린 행정지도는 13건으로 집계됐다. 이 추세라면 올해 말엔 지난해 전체 행정지도 건수(20건)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금감원 행정지도는 2018년 8건, 2019년 7건에 불과했으나 2020년(19건)부터 지난해까지 꾸준히 20건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금감원이 금융회사 등에 법령 등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직권으로 필요한 지침을 개별적이거나 구체적인 형식으로 제시하는 ‘감독행정작용’도 감소세를 보이다 다시 부활했다. 2017년 22건에 달했던 감독행정작용은 2018~2019년 10건, 2020년 4건, 2021년 6건에 이어 지난해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는 하반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7건이나 조치됐다.
그림자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금감원의 약속과 대비되는 흐름이다. 금융당국은 8년 전인 2015년 금융규제혁신 차원에서 그림자 규제를 없애겠다는 방침을 처음 밝혔다.
이복현 금감원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7월에도 금감원은 그림자 규제 철폐를 재차 공언했다. 법치주의를 강조해온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 ‘변화에 뒤처진 금융규제 혁신 및 감독관행 혁신’이라는 국정과제로 담긴 데 따른 것이다. 금감원은 당시 이 원장 주재로 ‘금융관행혁신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사실상 구속력이 있는 그림자 규제를 면밀히 살펴 필요한 규제는 규정화하고 환경 변화로 실익이 없어진 경우엔 과감히 철폐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계약서비스마진(CSM) 가이드라인 논란은 이 원장 취임 이후 그림자 규제의 대표 사례다. 앞서 금감원은 실손의료보험 손해율, 무·저해지보험 해지율 등을 가정할 때 사용할 지침을 마련해 보험사에 안내했다.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도입 후 보험사들이 다소 낙관적으로 가정해 실적을 부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가이드라인 적용 방법이 문제가 됐다. 금감원은 가이드라인 적용시기와 관련해 기준을 내놓지 않았다. 당국은 회계상 변경 효과를 당해년도 및 그 이후 기간의 손익으로 전액 인식하는 ‘전진법’을 염두에 두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부 손해보험사들은 전진법 적용 시 1분기 순이익이 최대 수천억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며 회계상 변경 효과를 과거 재무제표에 반영해 당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소급법’을 요구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당국의 초기 가이드라인 제정 당시 금융당국은 업계 의견수렴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보험사에 이 같은 방식을 수용하게끔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뒤늦게 보험사 최고경영자(CEO)들을 소집한 데 이어 회계법인까지 불러 모아 논의에 나섰다.
부동산 신탁사의 부실에 대비하기 위해 금융위원회가 준비 중인 ‘책임준공확약 업무처리 가이드라인’의 내용도 논란이 되고 있다. 기존에는 미분양, 준공 지연 등에 따른 손실 발생 시 신탁사가 책임을 져야했지만 가이드라인에는 대주단과 신탁사가 서로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사가 그림자 규제를 따르지 않아도 이를 직접 제재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막강한 검사권을 가지고 있는 당국이 포괄적 조항을 근거로 제재하거나 추가 검사를 통해 금융사를 압박하는 게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다.
수시로 이뤄지는 자료제출 요구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방대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금융사에겐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 공문 형태의 지도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푸념도 나온다. 금감원이 금융사 현업 담당자들을 불러 ‘회의 형태’를 취하면 사실상 증거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복성 검사를 감수하지 않는 한 감독당국의 불합리한 행정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림자 규제는 시장을 왜곡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지난해부터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대출금리 인하 압박을 가했다. 금융당국 수장이 금리 인상을 자제하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식이다. 예대금리차 확대가 감지되자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이에 은행들은 올해 초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에도 대출금리를 곧바로 올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자율감독기관’의 형태인 금감원이 법률과 규정에 입각해 감독행정을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미 금융당국은 2016년 금융위 및 금감원의 행정지도 및 감독행정작용을 경영건전성 확보와 소비자 보호의 목적에 한정한 ‘금융규제 운영규정’을 시행 중이지만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림자 규제 철폐가 요원하자 일각에선 독립적인 규제행정청 신설론까지 등장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잘못이 있다면 합당한 규제를 적용받고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면서도 “감독행정이 자의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를 줄여야 규제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